KAKAIRU ONLY 페러렐 90% 이상 분포 주의
※표시가 붙은 글은 폭력 및 성적 묘사를 포함합니다. 표시가 없어도 기본 어른테이스트

※ 연예계 카카이루 주의

사무실 왔다갔다 하기 귀찮다고 소속사에 사옥에 딸린 오피스텔에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 코노하 ENT 소속 연예인들.
카카시, 이루카, 겐마, 야마토, 사스케
원래는 오래전에 쓴 시리즈물이었으나 카카이루만 일단 정리했습니다.

가벼운 오해에 얽힌 이야기



1.

눈이 금방 떠졌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미간을 좁히며 벽시계를 보니 오전 열한시가 조금 넘었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느낌으로는 좀 더 오래 잔 것 같은데....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막 자다 깬 것 같지 않은 가벼움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몸을 짓누르고 있던 피곤과 피로는 어디론가 싹 사라져 버리고 없는 것 같았다.
어제는 음악방송 첫 1위 축하 뒷풀이가 있었다. 저한테 1위 쯤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지만 서도, 그래도 또 막상 무대에서 제 이름이 불리니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더라.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야, 적당히 마셔. 옆에서 누가 뭐라 건 간에 간만에 넘기는 술은 꿀떡꿀떡 잘도 넘어갔다. 정말 말 그대로 소주에 꿀이라도 한 사발 타 놓은 것 같았다. 그 덕분에 초반부터 평소 주량을 훌쩍 넘겼다. 술에 취해 남 앞에서 헤롱헤롱 대는 건 꼴불견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제만은 예외였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해버리는 성격에도 과연 첫 앨범의 첫 1위는 특별했던 것이다.

'간만에 잘잤네...'

분명 술을 진탕 마셨는데 머리 하나 안 아팠다. 굳이 따지자면 뭔가 해장을 제대로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제 마신 게 술이 아니고 물이었는가 보다. 그는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섰다. 고개를 양 옆으로 한번씩 꺽었다가 오른쪽 어깨를 앞뒤로 빙빙 돌렸다. 상태 나이스. 옆구리가 살짝 아프긴 한데 뭐 괜찮았다. 새삼 제 튼튼한 몸에 감탄이 든다. 1위 한번 해보자고 왠갖 스케쥴에 치여 혹사 당한데다, 아무리 술이 센 편이라도 그렇게 작정을 하고 마셔댔는데 되려 건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희한하게도 몸 뿐만 아니라 머리도 아주 상쾌한 기분이니 요상한 일이었다.
뭐, 어쨌든 상태가 나빠진 것도 아니고 멀쩡하니 뭐든 좋다.
어제 밤 늦게까지 그렇게 뭘 처먹었는데 그새 소화가 다 된 모양인지 허기가 졌다. 나가서 뭐라도 먼저 먹어야겠다. 그 전에 바닥에 난장판으로 널부러진 시트를 집어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방이 좀 너저분했다. 아무래도 취해서 진상을 부리고 잔 모양이었다. 그런데.

"....?"

그는 손에 쥔 시트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왠 검붉은 얼룩이 흰 시트와 대비되어 시선을 끌었다. 얼룩을 손톱으로 긁어보니 딱딱하게 굳어서 메말라 있었다. 시트를 털어 보면 그런게 한 군데만 있는게 아니고 군데군데 있었다. 어느 부분에 가서는 짓뭉개져서 꽤 큰 얼룩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사실 그 모양새가 꽤 호러였다. 제 착각이 아니라면 뻘건 핏자국이 분명했다. 설마 자다가 코피를 흘렸나. 코 밑을 더듬으며 잠시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일단 얼굴에 코피 자국이 없었고, 또 핏자국 사이사이에 있던 뭔가 다른 것 때문에.
그런데 이게 좀 많이 당혹스럽다. 허옇게 늘러 붙어 얼룩덜룩한 것이, 이건 아무리 봐도 정액같았다. 핏자국에 섞여 있었지만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 설마라고 생각해보려해도 희미하고도 분명하게 올라오는 밤꽃 냄새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다급히 어제의 기억을 더듬었다. 이건 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어제 밤에 뭘했지?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지만 사실 뭘 더 생각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흰 얼굴 색이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씨발."

생각이고 자시고, 일단 집에 와서 뭘 했는지 기억이 아예 없었으니까.
그는 본능적으로 먼저 제 몸부터 이곳 저곳 살폈다. 침대 시트 위에서 핏물과 정액이 발견됐는데 한가지 밖에 더 있겠는가. 다행히 제가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당하는 건 스스로 용납도 못 할뿐더러 당하면 죽을 정도로 아프다던데, 상처도 없고 뒷구멍이 아프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일차적으로 이 숙소에서 저를 덮칠 만한 간 큰 놈은 없을 거란 생각을 했다. 안도의 숨을 내쉰 것도 잠시, 그럼 이것이 제가 다른 놈을 덮쳤다는 소리가 된다는 사실에 낭패했다. 당했든 덮쳤든 엄청 재미 없는 상황이다. 누구지.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기억이 하나도 안났다.
이렇게 되고 보니 당황스럽지만, 한편으론 그제서야 수긍이 갔다. 어쩐지 몸이 개운하다고 느꼈던 게 이거였구나. 아침에 일어나면 묵직하게 아랫배를 누르던 나른한 느낌이 없었던 것이다.

"아 씹...."

새벽에 깼을 때 종종 그런다. 요즘에 바쁘다고 계속 숙소를 비워서 이루카 얼굴 한번 볼 새도 없으니 더 그랬던 것 같다. 반쯤 어정쩡하게 선 걸 보면 성질 급한 그는 아주 머리 끝에서 열이 뻗쳤다. 먼 숙소까지 가서 우미노 이루카을 잡아 올 수도 없고, 야한 잡지도 없고, 다른 걸 찾기도 귀찮아서 그냥 혼자 적당히 뽑아 버리고 그랬다. 그런데 것도 한두 번이지 슬그머니 짜증이 올라오려던 참이었다. 어금니를 빡 갈고서, 돌아가면 당장에 우미노 이루카부터 어떻게 확 해버려야겠다, 그런 마음을 먹었었다. 마냥 애 같아서 놔뒀더니 더 이상은 내가 안되겠다.
….
분명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건 아닌데.
욕불 겸 술김에 떡친 건 둘째 치더라도 상대가 누구였는지 생각이 안 난다는게 문제였다. 그는 쥔 시트를 신경질적으로 펄럭 들췄다. 누가 봐도 분명한 정사의 흔적이 밝은 햇빛아래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젠 당혹감 보다도 짜증이 확 일었다. 하지만 여기서 초조해 하면 될 밥도 안된다는 것은 알았다. 시트를 방구석에 박아 놓고 책상 의자에 앉아 찬찬히, 그러나 필사적으로 어제 밤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그래, 일단 다른 건 다 제쳐 놓고서라도 어느 놈 붙잡고 떡을 쳤는지는 알아야겠다. 분명 숙소 인간들 중 하나일테고......

"짜증나게....."

하지만 그게 생각한다고 순순히 생각날리가 없고.
오른쪽 다리를 달달 떨다가 하릴 없이 방구석을 몇번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엔 방문을 벌컥 열었다. 갈증이 확 났다. 생각 안나는 거 생각한다고 박혀 있어 봤자 해결 안난다. 누구든 마주치면 뭔가 반응을 보여줄 것이다. 옛말에 복잡한 일일 수록 단순하게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나.
공교롭게도 나오자 마자 거실에서 사람을 마주쳤다. 그것도 두사람이나. 야마토는 늘어져서 TV를 보고 있고, 사스케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는 바짝 긴장했다. 혹시 저 중에...? 그는 눈빛을 날카롭게 세우고 거실로 나왔다. 두 사람은 카카시를 보고서는 각자 한마디씩 던졌다.

"새벽에 늦게 들어왔다던데 일찍 일어났네."
"...어어."
"일등한 거 축하합니다 형님"
"나도."
"아...어. 그래. 땡큐."

그러고선 둘은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제 하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후. 평소와 다름 없는 반응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 비슷한게 나왔다. 예상외로 누군지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지금만 봐도 저 둘은 아니다. 당했다면 저렇게 속 편한 소리 하며 앉아 있지는 않겠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입에 들이 부었다.
남은 것은 시라누이 겐마와 우미노 이루카였다. 그래도 그는 꽤 한숨을 돌렸다. 아무래도 우미노 이루카인 것 같았다. 사람이라는게 저 좋은 쪽으로 해석하기 마련인데, 우미노 이루카한테 마음이 있는 그는 그래도 역시 우미노 이루카가 가장 유력하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게다가 시라누이 겐마만은 실수로도 아닐게 분명했다. 겐마가 순순히 당할 만큼 만만한 놈이 아니고, 설마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기로서니 제가 십년지기 친구 뒷구멍을 뚫었을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우미노 이루카다. 그렇지, 또 누가 있겠나. 우미노 이루카 밖에 없다.
이렇게 여기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래도 이루카는 내가 저를 좋아하는지 몰랐을 건데 많이 놀랐겠다. 거기다 아무래도 억지로 강간을 한 것 같아서 좀 걸렸다. 최대한 곱게 곱게 다뤄주고 싶어서 참았던 건데. 당장 가서 싹싹빌고 이참에 사귀자고 고백하면서 잘 구슬리자. 설득하기 힘들겠지만 어차피 벌어진 일 좋게 좋게.....
쾅-
뒤에서 갑자기 들린 큰 소리에 마시던 물이 목에 걸렸다. 켁켁 기침을 하고 돌아보는데 어느샌가 방에서 나온 시라누이 겐마가 카카시를 노려보고 있었다.

"개새끼야. 시끄럽게...."
"시끄럽냐?"
"뭐?"
"짐승새끼."

헉소리 날 정도로 싸늘한 얼굴에 싸늘한 말투였다. 식은 눈이 꽤 매서웠다. 짐승이라는 소리도 태어나서 처음들어봤다. 그것도 그냥 짐승도 아니고 짐승새끼. 발끈해서 뭐라고 욕을 한사발 퍼부으려고 했는데 겐마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그는 금방 눈치챘다.

"....너 어디 아프냐?"

눈빛에만 퍼런끼가 있는 줄 알았더니 얼굴에도 퍼런끼가 돌았다. 안색이 참 나빠보였다. 덕분에 나오려던 말을 물이랑 같이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기억 안나는 사이 뭔가 한 짓이 있는 그로서는 시라누이 겐마가 갑자기 저한테 이상하게 구니까 조금이 아니고 많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야...."

저새끼가 왜저러나 싶어서 물어보려는데 겐마는 말할 틈도 안주고 휙 돌아서 제 방쪽으로 걸어가버렸다.

"야!"

불러도 대꾸는 커녕 돌아보지도 않는다. 근데 그 걸음걸이라는게 또 좀 이상했다. 제대로 못걷고 좀 어정쩡하게 걸었다. 중간에 멈춰서서 허리를 한번 짚었을 때는 왠일인지 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또 쾅. 시라누이 겐마의 방 문이 거칠게 닫혔다. 저 새끼가 지금 저 보라고 저러는 것 같았다. 그는 조심스레 야마토에게 물었다.

"저 새끼 왜 저래...?"
"겐마형님? 겐마형 오늘 아침부터 저렇게 기분 안좋았는데."
"왜 저렇게 병신같이 걸어?"
"글쎄. 어디 다쳤나?"

근데 하필 지금 저런 반응은 좀 위험한거 아닐까. 덜컥, 절대 하고 싶지 않았던 상상을 했다.

"다쳤다고?"
"몰라. 물어봐도 안가르쳐 줘서."
"언제부터?"
"어제 밤까지 멀쩡했는데 아침 되니까 갑자기."

야마토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그 간단간단 하면서도 명료한 대답에 그는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기억은 안나지만 시라누이 겐마은 절대로 아닐건데...? 안색이 나쁜 건 뭐 감기 같은게 걸렸거나 기분이 나빠서 그런 걸 수도 있고, 허리가 아픈건 때마침 무거운 걸 들다 삐끗했을 수도 있고. 하지만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자꾸 짐승이라고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시라누이 겐마한테 무슨 짓을 했기에 제가 짐승 소리를 듣게 된 건지 모른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겐마랑은 실실 웃으면서 농담도 치고 그랬다.

"왜, 왜 갑자기?"

그는 병신 처럼 말까지 더듬었다. 하지만 관심이 온통 TV로 쏠린 야마토는 그거야 나도 모르지 시큰둥한 대답만 돌려줄 뿐이었다.
맞다.....!
그때 뭔가가 머리를 싹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지체 없이 제 방안으로 달려들어갔다. 그게 어디있지? 어디다 뒀지? 그리고선 어제 입었었던 옷가지들을 미친듯이 뒤졌다.

1차로 고깃집에서의 술자리가 끝나갈 때쯤, 가게 안은 2차는 어디로 갈까 시끌벅적한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다. 카카시도 어딜 가든 끝까지 달려 보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라 그 사이에 끼어서 몇 마디 하고 있었다. 고깃집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그의 핸드폰이 드르르륵 우렁차게 진동했던 것은 그 즈음이었다. 주변이 그렇게 시끄러운데도 핸드폰은 제 주장을 제대로 했다. 주인 닮아서 힘도 더럽게 좋아. 발신자 표시에 시라누이 겐마의 이름이 깜박였다. 이때도 술을 상당히 마신 상태긴 했는데,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정도는 아니었다.

-1위 한 거 존나 배 아파서 전화했다.
"지랄한다."

십년 세월을 알고 지내니 이게 생활이고 이게 우정이다. 시라누이 겐마는 카카시에게 잘나가서 좋겠다느니 어쩌느니 그런 소리를 해 댔다. 말투는 연신 틱틱대고 있었지만 기분 상하지 않고 대충대충 대꾸해 줄 수 있는 것은, 원래 이런게 겐마식 축하 방식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축하한다는 말 한번 환장하게 길게 한다. 그래도 일부러 전화까지 하다니 겐마깐에는 1위 한 거를 꽤나 생각해 주고 있는 거였다.

-근데 새꺄 일등 했으면 당장 이 형님한테 보고를 해야지 술부터 퍼 마시고 있냐?
"닥쳐. tv에서 봤음 됐지."

어찌됐든 저 생각해서 전화까지 해주다니 고맙다는 마음이 든다. 다른 새끼들은 뭐하고 자빠져있는 건지 연락 한 통 없는데 그래도 친구라고 먼저 전화 걸어온거다.

-하여간 싸가지는 어디다 밥말아 먹었는지....
"너한테 들을 얘긴 아닌 듯."

근데 고맙긴 한데 지금은 때가 좀 별로인 것 같았다. 그는 통화를 오래 이어나가기엔 머리가 좀 알딸딸했다. 또 일단 지금은 술 좀 더 마셔야 될 것 같으니까 대충 끊고 나중에.....그런데 갑자기 시라누이 겐마가 대뜸 너 내 선물은 샀냐고 물어봤다.

"뭐야 그게."
-야아- 이자식 썩은 인간성 진작에 알아봤지만 이젠 친구고 뭐고 안 보이냐?
"내가 왜 니 선물을 사는데?"

물론 그 와중에도 또 한잔 두잔. 그런 카카시를 보고 야, 이 자식 오늘 술집 술은 다 거덜 내고 갈 생각인가 보다. 옆에서는 이런 소리도 들리고.

-임마. 너는 십년지기 친구 생일도 모르냐?
"....생일이라고?"

말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슬슬 안 돌아가는 머리로 날짜를 셌다. 시간이 좀 걸리는 걸 보니 취하긴 취했다. 그런데 겐마 말이 맞았다. 그제서야 아차 하고 겐마 생일이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원래 날짜를 잘 세는 편이 아니었고, 얼마 전에 매니저가 말해줬던 것도 까먹고 있었다. 요 며칠 너무 바빴다.
겐마는 낄낄 웃으며 몇 마디 더 하더니 맨 마지막에 가서야 일등 축하한다 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그게 참 시라누이 겐마 다웠다. 겐마는 원래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 못해서 대화 패턴이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새 채워져 있던 잔을 들었다. 오늘이 시라누이 겐마 생일이라고.......사실 끼리끼리 논다고 겐마고 저고 남 생일 챙기고 이런 데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더욱이 둘 다 간지런 소리는 잘 못하니까 친구 생일이랍시고 계집애 마냥 생일 축하해~이런 말을 해주거나 그런 건 없었다. 그냥 때 되서 야 누구 생일이란다 이러면 백화점 상품권 같은 것 하나 던져주고, 이렇게 바쁘면 슬쩍 거르기도 하고. 막말로 기집애들도 아니니까.
그러니 시라누이 겐마가 생일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정말로 선물을 바래서나, 섭섭해서가 아니고 장난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평소 같았으면 다음 생일에 챙겨주자 생각했거나, 나중에 시간 날때 밥이나 사자, 그래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그는 아주 기분이 좋고, 누구보다 마음이 풍족한 상태였다. 사람이 이렇게 풍족해지면 없던 아량도 생기고, 사소한 것에 신경쓰게 되고, 베풀게 되고 다 그런거다. 술에 취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2차가 끝났을 때 즘엔 이미 밤 열두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3차까지는 기본으로 가야한다고 가게를 나오는데 때마침 길거리 노점상이 있었다. 야야 너 어디가, 옆에 있던 사람들이 붙잡는데도 비틀비틀 그 앞에 가서 섰다. 국적 불명의 깜둥이가 두건이며 여러가지 악세사리를 놓고 팔았다.

".....야.....이거. 이거 줘."

그는 거기서 대충 손에 잡히는 걸 골랐다. 그가 손에 든 것은 파란색 두건이었다. 사실 이때 그는 너무 많이 취한 상태였다. 그래도 그때까지 시라누이 겐마의 생일이라는 것은 안 놓치고 기억을 하고 있었다. 길에서 파는 싸구려는 절대 안하는 겐마인데 그때는 무조건 뭐라도 안겨줘야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봐라, 저를 걱정해 주는 건 역시 친구뿐 아닌가. 고맙다 친구여. 미안했다 친구여. 그래도 사나이 가는 길에는 친구밖에 없다.

갑자기 예전엔 없었던 것 같았던 우정이 막 샘솟았다. 일 하느라 바쁘고 우미노 이루카 구슬려 잡아 먹을 생각만했지 정작 십년지기 친구는 너무 소홀히 했다. 그래, 이거 주면 엄청 좋아할거야. 사랑따우.....이루카 고 년은 이 오빠가 저를 얼마나 생각해주는지도 모르고 축하한단 문자 한통 없는데.

"이쁜아아......."

근데 또 이루카를 생각하니 갑자기 너무 너무 이쁜 우미노 이루카의 얼굴이 보고싶어졌다. 한번 보고 두번 봐도 또 보고 싶은 우리 이루카, 우리 이쁜이. 그래 이쁜이 한테도 뭐 하나 사다줘야지. 괘씸하지만 오늘은 오빠가, 어? 일등했으니까 봐준다. 너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 오빠가 마음이 좀 캡 넓다......

"끄윽....."

휘청이는 그의 시선을 사로 잡았던 것은 잘 진열해 둔 플라스틱 머리핀이었다. 여러가지가 많았다. 강아지모양, 토끼모양, 딸기모양, 사과모양.......그는 거기 주저 앉아서 한참을 고민했다.

"야아....하타케 카카시!! 얼른 가자고오!!"
"아 기달려보라고오!!"

옆에서 사람들이 잡아 끄는데도 힘으로 확 뿌리치고 고민을 많이 했다. 우리 이쁜이 한테는 뭐가 어울릴까. 이쁜이니까 뭐든 다 잘어울릴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제 눈에는 아무리 봐도 이루카는 강아지새끼 아니면 토끼새끼로 밖에는 안보였으니까 결국 플라스틱 분홍 토끼를 골랐다. 토끼핀을 손바닥 안에 넣고 꽉 쥐었다. 머리에 꽃아주면 졸라 예쁘겠다.

"잔돈은 필요 없다....."

어설픈 한국말로 만이천원이라고 말하는 흑인에게 무슨 택시기사 팁주는 것 마냥 집히는 대로 삼만원을 던져 놓고 일어났다. 그는 한 쪽 주머니에는 파란색 두건을, 또 다른 반대쪽 주머니에는 분홍색 토끼핀을 넣었다. 마음이 아주 든든하고 뿌듯했다.
그 후로도 사람들 끌고 또 가라오케로 삼차를 가고 미친 듯이 제 노래 부르다가 양주도 마시고 했다. 원래 필름이 잘 끊기는 편이 아니니까 그렇게 마셔도 숙소까지 어느 매니저가 데려다 주었는지도 기억이 났다. 비틀거리며 현관을 따고 숙소에 들어 왔을 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계를 봤는데 심지어 시간도 기억났다. 새벽 세시 삼십 오분. 이새끼들이 벌써 다 쳐자나, 이런 생각까지 했는데..... 딱 기억이 끊긴 시점이 바로 여기였다. 아무리 기억을 곱씹어 봐도 이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났다. 무슨 가위로 잘라놓은 것 마냥 싹둑.
오른쪽 자켓 주머니에서 이루카에게 주려고 샀던 토끼핀이 나왔다. 말짱한 정신에 보니 왜 사내새끼 선물로 토끼핀을 산 건지 이해는 안됐지만 어쨌든 이루카에게 주려고 산거였다. 그런데 파란색 두건이 없었다. 계속 설마 설마 하면서 아무리 뒤져도 안나왔다.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우미노 이루카거는 있는데 왜 시라누이 겐마 것만 없냐고.
그는 망연자실 했다. 그렇다면 제가 집에 들어와서 시라누이 겐마를 만났단 말인가. 우미노 이루카을 만난게 아니고? 그럼 겐마한테 두건 주고 나 뭐했는데? 시라누이 겐마 그 새낀 왜 또 오늘따라 안색이 나쁘고 잘 못걷고 허리가 아픈데? 왜 날 그렇게 쳐 죽일 새끼인 것 마냥 노려보는데? 갑자기 오한이 들면서 구역질이 났다. 머리가 해머로 맞은 것 처럼 딩-하고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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