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KAIRU ONLY 페러렐 90% 이상 분포 주의
※표시가 붙은 글은 폭력 및 성적 묘사를 포함합니다. 표시가 없어도 기본 어른테이스트

3


꽃샘추위도 지나가고 꽤 따뜻한 주말 오전이었다. 임무가 들어있지 않아서 카카시는 전날 저녁부터 이루카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함께 주말을 맞는 것은 처음이라 이루카는 내내 긴장 반 설렘 반이었다.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고 조금 늦은 아침을 먹으니 마치 같이 사는 사람들 같았다. 주방정리를 마치고 거실 쪽을 힐끗 바라보면 카카시가 소파 팔걸이에 반쯤 기대 누워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다. 그 느긋한 광경에 가슴이 뛰었다. 이루카는 그런 소소한 부분에서 커다란 행복을 느꼈다.
이루카는 조금 쭈뼛거리면서 카카시의 발이 뻗어 있는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TV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신경이 옆 쪽으로 쏠리는건 불가항력이었다. 카카시를 정면으로 보는 것이 자신이 없어서 그만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훔쳐보는 듯한 비굴한 시선이 된다. 물론 카카시는 너무 빤히 보이는 이루카의 그런 태도가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정말 화라도 낸다면 작은 초식동물처럼 저 멀리 도망가버릴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냥 모르는 척을 했다. 안그래도 벌벌 떠는데 더 소극적으로 변해버린다면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카카시의 그런 배려 아닌 배려 덕에 이루카는 마음껏 카카시의 맨얼굴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기실 이루카는 카카시가 생각하고 있는만큼 그렇게 비굴하거나 자신감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직장에 가면 똘똘하게 일을 잘했고, 학생이나 업무에 관한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도 있었다. (믿기지는 않지만 이루카는 나루토 때문에 카카시와도 싸운 적이 있다.) 오랫동안 홀로 외로웠고, 남자를 좋아하는 성벽 탓에 사생활에 대한 부분에서 방어가 단단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루카가 어떤 사람이든지간에 일만 잘 해주면, 대부분은 불만을 제기하기는 커녕 이루카를 아주 괜찮은 사람으로 대해 주었다. 자신이 어디까지 소극적이고 패기 없을 수 있는지 알게 된지는 얼마 안됐다.
늦게 찾아온 첫사랑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깊게 빠져서 몸도 마음도 죄다 뺏길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카카시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그 사실을 누구보다 놀라워했었던건 그 누구도 아닌 이루카 본인이었다. 카카시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날카로운 눈도, 오똑한 콧날도, 그 숨소리 하나까지 이루카에게 사랑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것이 아니었다. 만일 사람이 그리운, 단순한 애정결핍 증상이었다면 그 대상이 굳이 카카시여야 할 필요가 없었다. 매일 뭔가를 잘못한 것은 아닌지 조마조마함과 불안함에 시달리면서 그 옆에 붙어있을 필요가 없었다. 이루카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카카시의 눈빛 하나, 손짓 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앞에 서면 항상 떨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보면 너무 뻔하고 당연한 것도 잘 눈치채지 못했고, 닥쳐온 상황을 유들유들하게 넘기지도 못했다.
“왜 그래?”
마음대로 보라고 가만히 있었으면서, 또 너무 열렬한 시선을 보내오니 부담스러워진 카카시가 결국 참지 못하고 책을 접었다.
“아, 아뇨...아무것도.”
“하고 싶은 말 있었던 거 아니었어?”
말이라도 걸라치면 금새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마음에 안든다. 그래도 카카시는 인내심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성질같아서는 벌써 윽박을 주거나 무시하고 다른데로 가버렸을테지만 얼굴을 붉히고 머뭇거리는 이루카가 귀엽게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카카시는 어제 저녁부터 이루카가 평소와는 다른 묘한 느낌으로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괜히 카카시를 불러서 입만 벙긋거리다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리기를 몇 번. 화가나서 괜히 입술을 막았다가 혀를 넣고, 졸지에 섹스까지 해버린 탓에 무슨 말인지 결국 듣지 못했다. 이루카는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카카시가 그것을 알아주니 이루카는 당연히 감동을 받았고 조금 용기가 생겼다.
“카카시씨. 시간 괜찮으세요?”
“...그러니까 집구석에 처박혀서 이러고 있지.”
“아아...그렇, 죠.”
쉽게 본론으로 나아가지 않는 대화에 갑갑함을 느끼고 그런 생각이 알게 모르게 말투나 태도에 섞여 나왔다. 카카시라고 별로 이루카를 구석에 몰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루카는 자각을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명색이 사귀는 사이기도 하다. 나름 용기를 냈는데 면박을 주니 이루카는 금새 또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러는데? 괜찮으니까 말해.”
보다못한 카카시가 다시 이루카를 보챘다. 이번엔 꽤 다정한 투였다. 객관적으로 카카시는 살갑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성격이었지만 이루카에 관해서는 나름의 포용력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이루카는 카카시의 재촉에 어물어물 하면서도 본론을 입에 댔다.
“저기, 그럼, 괜찮으시면... 같이 안나가실래요?”
고작 나가자는 얘기하기가 그렇게 힘드냐고 어이가 없으면서도, 카카시는 내심 놀랐다. 이루카가 먼저 무엇인가를 제안한 것은 처음이었다. 거기다 그 제안이라는게 아무래도 데이트 신청 같다. 신기해서 빤히 바라보았더니 이루카의 얼굴이 화덕마냥 빨개졌다. 잠시간 침묵에 이루카는 조금 낙담을 느꼈다. 어제 오전까지 열흘이나 넘게 임무를 하고 왔는데 또 밖에 나가자는 건 별로일 수도 있겠다. 오랜만에 맞는 한가한 때인데 카카시는 집에서 편히 쉬는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게 틀림 없다. 주말에 같이 외출하거나 따로 데이트란걸 해본 적 없으니까 벚꽃이라도 같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좀 그렇나. 생각해보니 남자끼리인데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인가 싶기도 하고.
“나랑 같이 있는 거 남들이 보면 질색이나 하면서 어쩌려고?”
그렇게 비꼬듯 말하는 것 치고 카카시는 왠지모르게 반가운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것을 캐치하지 못한 이루카는 얼른 변명거리를 입에 댔다.
“날씨도 좋고, 꽃도 예쁘고....아, 별로 안내키시면 안나가도...”
카카시의 말을 듣고보니 남이 보면 곤란해질 것 같기는 했다. 물론 이루카는 카카시에게 나가자는 제안을 하기 이전에 벌써 남에게 할 변명거리를 생각해 놓고 있었다. 우연히 만나서 어쩌다 보니 차를 마시게 됐다던지, 학생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던지. 전혀 이질적인 남자 둘이 행락객들 틈에 섞여 꽃나무 아래에 서 있는 시추에이션에서는 무슨 이유를 대도 이상하게 여겨지겠지만. 그렇지, 좀 이상하지. 그래도 한번쯤 바깥공기도 쐬고 하면 좋겠는데 그건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속으로 변명을 중얼거리는 이루카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카카시 역시 자신들이 대외적으로 나다닐만한 사이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카카시는 이루카에게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복을 입기 시작했다. 거울을 보면서 뻗어나간 머리도 차분하게 넘기고 평소에는 잘 안입는 사복도 걸쳐 입는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자연스러운 카라가 들어간 짙은 감색 카디건. 스타일이 좋은 카카시는 평범한 옷도 외국 잡지의 스트리트패션에서나 나올법하게 잘 소화해냈다. 평소라면 너무 멋있다고 넋을 빼 놓고 봤을텐데 이루카는 그럴 경황은 아니었다. 자신의 말에 짜증이라도 난 건가 싶었다. 데이트하러 나가자는 말이 그렇게 싫었나? 그래서 나가버리려고 하나? 다른 여자라도 만나려고?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이 드문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 나가자는 말 따위는 하는게 아니었다. 눈가가 시큰해지는 건 부지불식간이다.
“아, 아무것도 아니니까.. 안나가도 정말 괜찮...진짜로 괜찮은데.”
“....왜 갑자기 울려고 그래? 나가게 빨리 옷이나 입어.”
카카시는 당황한 듯, 혹은 황당하다는 듯 이루카를 보고 툭 내뱉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가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외출준비를 했더니 갑자기 눈물이 글썽글썽. 설마 울 정도로 감격이라도 했나.

아무튼, 미적거리는 이루카를 다그쳐 옷을 입게 하고 두 사람은 첫 외출을 시도했다. 먼저 나가자고 한 사람이 이루카였으므로 카카시는 행선지를 이루카에게 맡겼다. 생각지도 않게 사복 데이트를 달성한 이루카가 향한 곳은 벚꽃이 한창인 인근 공원이었다. 물론 카카시는 고작 가자는 곳이 공원인가 싶어 김이 빠졌다. 꽃놀이 따위 뭐가 좋냐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벚꽃이 생각보다 예뻤고 이루카가 생각보다 더 즐거워보였기 때문에 이내 이런것도 나름 괜찮지 않느냐 싶어져서 입을 다물었다.
오래 걷기에는 더운 날씨였다. 둘은 그늘진 벤치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둘이서라면 드문드문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먼저 커피를 다 마신 카카시가 벤치에 양팔을 걸치고 이루카에 시선을 주었다. 이런 사소한 일에 울고 웃는 이루카가 아무리봐도 신기해서 쳐다본 것 뿐인데, 이루카는 빨리 마시라고 눈치주는건가 지레짐작해서 결국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바보냐?”
“...아, 으으... 괘,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가만히 있어봐. 진짜, 안그래 보이는데 되게 허당인 거 알아?”
한참을 켁켁거리고 있으면 카카시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흘린 커피며 젖은 입가를 닦기 시작했다. 등에도 손을 올려 쓰다듬어 주었다. 따듯한 손바닥이 등을 감싸자 경련은 금세 가라앉았다. 이루카는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상황이 너무 좋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눈을 피할 곳이 어디있을까 고민하다 결국 가까운 공원을 선택한 것이었는데, 정말로 둘이 함께 있는 내내 단 한 사람도 그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보통 마을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보통처럼 나란히 걷고 봄 풍경에 나란히 비슷한 감상을 나누었다. 이루카는 그것만으로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거기다 카카시는 등에 올렸던 손을 그대로 이루카의 어깨 위로 옮겨 꽉 끌어 안아주기까지 했다.
“조금 진정 됐어?”
“...네.”
누가 볼까봐 걱정을 하면서도 손을 떼내고 싶지는 않았다. 커피도 다 마셨고, 이제 슬슬 돌아갈 때인가 싶다. 아침이 늦기도 했지만 오후가 한참 지났는데 아직 점심밥도 먹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에 닿는 온기가 기분이 좋아서 가자는 말을 미루고 있으면 카카시가 물었다.
“이제 어디 갈래?”
“또 어디 가요?”
“그럼 그냥 집에 가려고?”
이번엔 카카시가 이루카를 이끌 차례였다. 카카시는 당황한 이루카를 끌고 인근의 고급 식당에 데려갔다.
“아, 이런데는 너무 비싸요.”
“별로 안비싸.”
카카시의 말에 반신반의하며 따라 들어갔는데 역시나. 가끔씩 마시라고 주는 술의 시세만 봐도 그렇지만, 카카시는 돈을 쓰는데 브레이크가 없었다. 이루카는 모든 주문을 카카시에게 맡겼다. 이내 카카시의 취향대로 생선을 중심으로 채소와 산나물이 조화를 이룬 상이 차려졌다. 카카시는 꽤 미식가였으므로 선택된 메뉴에는 불만할 거리가 없었다.
식사는 별 대화 없이 지나갔다. 먹는 속도를 맞춰서 거의 비슷한 때 식사를 마쳤다. 단 것을 싫어하는 카카시는 디저트로 나온 복분자단자와 연사과를 이루카에게 주었다. 카카시가 준 것이니 거절도 못하고 다 먹고 나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배가불렀다.
“걷기도 힘들 정도면서 뭐하러 그걸 다 먹어?”
“아까워서...”
“별게 다 아깝다. 배탈이라도 나면 더 고생이지.”
계산은 카카시가 했다. 물론 이루카는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이 반을 낼 심산이었다. 다음달까지 굶고 다닐 판이지만 자신도 남자니까 이런 금전적인 부분에서 부담은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카카시는 쓸데없는 생각 말라며 이루카의 말을 자르고는 먼저 척척 계산을 해버렸다. 이래도 되나 싶은데 계산을 마친 카카시는 왠지 뿌듯하다는 식으로 씩 웃으며 이루카를 데리고 가게를 나왔다. 나중에 갚겠다거나 하는 말은 분위기를 망칠까 봐 미처 하지 못했다.
높은 가격 만큼이나 긴 식사를 마치고 나면 어느새 어스름이 지기 시작한 시각이었다. 일교차가 커서 해가 지면 바람이 꽤 쌀쌀했다.
“춥진 않아?”
“아뇨...”
“추우면 춥다고 해. 가면 되니까.”
그래도 금방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함께 꽃길을 걸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고 고급스럽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식사까지 했다. 처음에는 잠깐 산책이나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하고나니 진짜 데이트 같아서 집에 가기가 아쉬웠다. 하지만 다음 행선지가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보이는 길을 따라 마냥 걸으면 근처에 괜찮은 호수가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저녁에 보는 호수는 낮의 공원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두 남자가 연인들이 가득한 호숫가를 말도 없이 뚜벅뚜벅 걷기만하는 건 보기에도 참 이상했다. 그래도 이루카는 열심히 카카시를 따라 걸었다. 괜찮은 뷰를 발견하고 호숫가의 펜스에 기대 서서 잠시간 노을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찾아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커플들은 어둠을 타 끼리끼리 뭉치기 시작했다. 이루카는 옆에선 카카시의 옆 얼굴을 보았다. 같이 있었던 것이 처음도 아닌데, 오늘따라 참 분위기가 묘하고 이상했다. 안그래도 들떴던 마음이 더 부풀어 올랐다.
이루카는 눈치를 살피며 카카시에게 더 바짝 붙어 섰다. 카카시가 그런 이루카를 쳐다 보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는지 그냥 놔두고 있었다. 하늘에는 새파란 달. 손이 닿을락 말락 스치며 온기를 전했다. 카카시는 꽤 자연스럽게 이루카의 손을 잡았다. 바짝 긴장한 이루카는 당장 호수에 잠수라도 할 것 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게 웃겼는지 카카시는 피식 웃더니 잡고 있던 이루카의 손을 그대로 자신의 가디건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긴장에 얼음장 같았던 손이 손바닥에 꽉 붙들리는 감각, 이루카는 그 뜨거움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단순히 손을 한번 잡은 것 뿐인데 세상이 뒤집힌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버리고 만다. 정말로 카카시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만다.
이루카는 연애를 해 본적이 없었지만 연애라는 건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거란 자각은 가지고 있었다. 서로를 생각하고 아끼는 관계는 틀림 없이 두 사람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토대로 가능한 것이다. 틀림없이 이루카는 카카시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카시가 자신을 정말 좋아해 주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늘 자신이 없었다. 애정이 어린 말이나 고백도 듣지 못했다. 조금의 호감이라도 가지고 있었으니까 사귀자고 해 준 것이고, 이렇게 시간도 함께 보내고 있는 것이지만 이루카의 마음은 그런 호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컸다. 즉흥적으로 누군가를 사귀고 아무렇지 않게 금방 헤어질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때문에 이루카는 늘 카카시와의 관계가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었다. 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고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카카시의 옆에 여자가 있어도 말도 못했고, 옆에 계속 있어도 되는지 불안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함께하는 시간이 계속 된다면, 서서히 자신감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게 꼭 절절한 사랑은 아니더라도, 옛 말에 정으로 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딱히 마음이 없어도 같이 있다보면 없던 정도 생기고 그럴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면 희망이 솟아 올랐다.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그런 희망을 더욱 더 거세게 부채질 해댔다. 문득 손을 잡는 힘이 강해져서 고개를 돌리면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카카시의 시선이 이루카를 향해 있었다.
“왜....”
“....집에 갈래? 아무래도 좀 추워 보이는데.”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밤의 한중간을 떠올리게 하고 이루카는 확 얼굴을 붉혔다. 쥔 손바닥에 금새 땀이 뱄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였다.
“어머, 카카시 아냐?”
어디서 그런 민첩함과 힘이 있었는지 이루카는 순식간에 카카시를 뿌리치고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카카시를 부른 건 아사쿠라였다.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죽 흘렀다. 혹시 손을 잡았던 것을 들켰나 싶어 이루카는 얼른 아사쿠라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듯 그녀는 쾌활하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아사쿠라를 신경 쓰느라 보지는 못했지만 카카시의 기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진 것이 느껴졌다. 확실히 남자끼리 갖잖게 손잡고 있는 걸 아는 사람에게 들키면 기분이 나쁠 수 있다. 언제나 그랬듯 이런 순간에조차 이루카의 사고는 마이너스 쪽으로 흘러갔다.
“뭐냐 너....”
“뭐긴 뭐야. 동료들이랑 간만에 밤벚꽃 보면서 술이나 마실까 하고 나왔는데...왠일로 사복이야?”
“사복도 가끔 입어. 신경 꺼.”
“그래? 그나저나 옆에 분은 누구?”
계급이 같아서 그런가? 아니면 여자라서?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다. 아사쿠라는 여전히 카카시에게 사양이 없었다. 꽃놀이를 나왔다더니, 그녀는 정규복이 아닌 아기자기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스커트 밑단에 달린 프릴이 그녀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예쁜 옷차림의 그녀를 보면서 이루카는 혹시나 왜 둘이 같이 있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위아래로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목이 바싹 마르고 긴장했지만 그런 것은 내색하지 않는다.
“아사쿠라 상닌이시죠. 중급닌자인 우미노 이루카라고 합니다.”
아사쿠라가 곧 알겠다는 듯 손뼉을 딱 쳤다.
“접수에 있는 그 선생님? 맞지? 둘이 데이트하고 있었어? 사복 입고 있으니까 누군지 몰라 보겠다.”
아사쿠라는 꽤 상세히 이루카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듯한 투였다. 두 사람은 대화도 제대로 해 보지 않은 사이라 그건 상당히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귀에 박혀 온 데이트라는 단어 때문에 이루카는 미처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데이트라는 말을 했지만 그런 말은 보통 남자 둘을 놓고 사용하지는 않는다. 혹시 이상하게 보였나 싶어져서, 이루카는 갑자기 변명을 하고 싶어졌다.
“날씨도 좋은데 같이 술이나 먹자.”
그러나 변명할 틈도 없이 그녀는 눈 앞에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카카시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선은 이루카를 향한 채였다. 예쁜 원피스의 미녀가 커다란 술병이라니 이상한 조합이다. 그래도 당당한 여자가 그러니까 또 괜찮아 보였다. 보기 드문 미녀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얼굴에 박혀서 몸둘바를 모르겠다. 역시 남자 둘이서, 그것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끼리 있으니 이상해 보이는지.
“아뇨, 저는....”
“왜? 상닌이라도 다들 괜찮은 애들이니까 어려워 하지 말고.”
이루카의 거절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카 쪽의 난간에 기대섰다. 그 순간 카카시의 미간이 조금 구겨지는 것을 이루카는 놓치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다정하다고 할 법한 모습이었는데 뭐가 마음에 안들어서 그새 또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다. 문득, 얼마 전에도 상닌 대기실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도 아사쿠라가 있었고, 이루카가 있었고, 카카시는 화가 났다.
이루카는 숨을 집어 삼켰다. 동료일거라고 생각해서 마음이 아픈 것도 참을 수 있었는데 설마 그녀를 좋아하기라도 했던 것인가? 그래서 화가 났을까? 들키면 안되는데 그녀에게 자신 따위를 보여 버려서? 설마 그래서 카카시가 기분이 나빠진 것이라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이 괴로워져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확실히 확인한 사실은 아니지만 그럴싸한 일처럼 보였다. 그런 일이 아예 없으리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기뻤는데, 구렁텅이로 처박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붉어진 눈을 누가 볼새라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이루카는 그녀를 향해 주섬주섬 아까 미처 하지 못한 변명을 했다.
“아... 괘, 괜찮습니다. 카카시 선생님이랑 우연히 마주쳐서, 마침 애들 문제로 상담도 있었고... 저, 진짜 우연히 만나서 그냥 잠깐 얘기를... 어쩌다보니 말이 좀 길어져서...”
이루카는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말들은 모두 거짓이었기 때문에 크게 뱉어지지 못하고 웅얼웅얼 허공에 의미 없이 사라졌다. 부자연스러운 이루카의 변명에 카카시는 더 미간을 우그러트렸다. 급기야 살기마저 감돌아, 이루카는 차마 카카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지 못했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내린 결론은 어쨌든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있으면 나쁜 기분도 괜찮아질 것이다. 목례 후 뒤돌아 가려는 이루카를 아사쿠라가 급히 잡았다.
“이루카 선생님 잠깐만요. 왜...”
“저기, 전 이제 가 봐야해서...”
“아니, 그게 아니라... 카카시! 너 뭐해?”
아사쿠라가 탓 하듯 카카시를 올려다 보면 침묵을 지키던 카카시가 이루카를 향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상담 응해 줘서 고마웠어, 이루카 선생.”
“너 지금 무슨...”
“우연히 만나서 상담한 것 뿐이라고 방금 들었잖아. 내가 뭘? 어차피 이제 더 할 얘기도 없었어.”
낮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추우니까 이만 집에 가자고, 그렇게 달콤하게 말했을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두 사람을 남겨둔 채 이루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향해 뛰었다. 자신이 너무 카카시를 좋아하는데 눈에 보이니까, 좋아하는 건 둘째치고 몸도 섞는 사이니까, 카카시는 별 생각 없이 외출도 해 주고 밥도 사준 것일지도 모르는데 혼자 들떴던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スポンサードリンク


この広告は一定期間更新がない場合に表示されます。
コンテンツの更新が行われると非表示に戻ります。
また、プレミアムユーザーになると常に非表示になり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