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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시가 붙은 글은 폭력 및 성적 묘사를 포함합니다. 표시가 없어도 기본 어른테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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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조와 야마토, 서로 다른 사람입니다





일요일 오후, 이루카는 학교 근처 한 작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이번 방학들어 하루 평균 2,3개의 아르바이트를 오가고 있는 이루카로서는 이런 낮 시간에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오후 3시에 끝나는 레스토랑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다음 아르바이트까지 두시간 정도가 비었다. 평소 같으면 학교 도서관에서 시간을 때웠겠지만 드물게 약속이 생겼다.

손목 시계를 보면 아직 약속시간인 4시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가방 속에 과외교재가 있었기 때문에 수업준비를 할 수도 있었지만 왠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신 이루카는 주머니에서 시종 묵직하게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던 은색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하타케 카카시의 것과 같은 은색 스마트폰. 결국 이루카는 그 남자에게 이 핸드폰을 건네주지 못했다. 원래는 받았던 모든 물건을 돌려주면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할 생각이었다.

(분명 그럴 생각이었는데.)

날이 선 것 같이 샤프한 디자인의 핸드폰이었다. 이루카는 손 안에서 반질거리는 액정을 응시했다. 까만 유리알같은 핸드폰 액정위로 익숙한 제 얼굴이 떠올랐다.

짙은 눈썹과 약간 처진 눈매. 그리고 그 눈매가 감싸고 있는 투지 없는 눈동자가 보였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 고집 센 듯 굳게 닫힌 입술. 못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못난 생김새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미남이라는 이야기를 들을만한 얼굴은 아니었다. 토끼에 비견될 수 있을만큼 귀엽고 아기자기하지도 않았다.

(대체 어디가 마음에 든 걸까....)

이루카는 하타케 카카시라는 남자와 처음으로 통화했던 날을 떠올렸다. 이루카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첫키스라는 것에 마음 설레하는 그런 소녀같은 타입은 아니었다. 반드시 첫키스는 좋아하는 사람과 해야하는 거라는 로망도 없었다. 이루카가 하타케 카카시의 키스를 밀쳐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서로가 너무 가까이 마주 서 있었던 어두운 복도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무심코 입술을 내 주었다.

이루카는 키스를 잘하고 못하고를 따질 수 있을만한 짬은 못되었지만 그 남자가 키스를 잘한다는 것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완전히 영근 성인 남성이 아니면 그렇게 농밀한 키스는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점막과 점막이 만나는 뜨거운 감각. 숨 조차 쉬기 어려울 정도로 입술이 빈틈 없이 맞닿아 있었다. 남자는 유연하게 고개의 각도를 바꾸어 가면서, 이루카의 혀를 휘감고 입안의 점막 하나하나를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싶었다. 이루카는 그 때를 생각해내고서는 저도 모르게 제 마른 입술을 가렸다.

-저는 싫어요.

이루카가 그렇게 말하면 남자는 이윽고 이루카의 목덜미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상체가 약간 멀어지고 남자의 흰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을 때는 숨이 막혔다. 어둠 속에서 반질거리는 두 눈동자가 시뻘건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라도 악물었는지 마른 양볼은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고 턱근육은 그림자를 통해 선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루카는 두려움에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단지 무서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아쉬운 거 하나 없는 주제에.)

이루카는 그 표정에 도대체 어떤 말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뭔가 잘못 말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이루카가 남자에게 핸드폰을 떠넘기지 못한 것은 결국 이 때문이었다. 기어이 핸드폰을 쥐어 주면서 돌려보내면 그가 상처를 입을 것 같았다. 물론 칼로 찔러도 죽지 않을 것 같은 남자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다니 우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남자는 울먹이기는 커녕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스스로도 밀기에 약한 타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이루카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렸다. 그나마 핸드폰을 받는 조건으로 그간 남자가 보내왔던 선물 상자들을 해치운 것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품에 다 들지도 못할 그 부피 큰 상자들을 떠넘기면 남자는 싫어하면서도 마지못해 그것을 받았다.

“주셨던거, 다 안 가지고 가시면 핸드폰은 절대 못받아요.”

이 협박은 생각보다도 더 성공적이었다. 이루카는 이에 덧붙여 말했다.

“제가 핸드폰 받았다고 해서 연락까지 받을 거란 생각은 하지 마세요.”

뿌리치듯 냉정하게 내뱉은 말에 남자는 돌연 한숨을 크게 쉬고서는 잠시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남자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로 이루카를 바라보았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너 집에 있는 시간이면 괜찮지 않아?”
“제가 언제 집에 돌아올줄 알구요?”
“야마토랑 바네사가 나한테 와서 아무런 보고도 안했을 거 같아?”

이루카는 혀를 찼다. 그러고보면 이루카를 찾아왔던 그 두 사람은 항상 들고온 박스와 전언을 이루카에게 직접 전달했었다. 이루카가 몇시에 귀가하든지 별로 상관 없는 것 같았다. 대략 일주일 정도 그렇게 집 앞을 왔다갔다 했으니 이루카의 귀가시간 쯤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을 터였다. 이루카를 향해 뻗은 손이 부드럽게 손목을 잡았다.

“너 열 두시 넘어 들어오는 날은 전화 안해. 화요일이랑 목요일, 일요일은 괜찮잖아.”

강압적인 말투는 아무래도 습관인 것 같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어조만은 애원하는 투였기 때문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뭐라 대답하지도 못하고 이루카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떠났고, 핸드폰은 그렇게 이루카의 손에 들어왔다. 오늘은 남자가 전화하겠다고 한 일요일이었다. 제 한말을 지킬 모양인지, 어제와 엊그제, 그리고 지금까지 핸드폰은 한번도 울리지 않았다.

(정말 전화 할 건가? 하겠지?)

남자에게 말했던 대로, 핸드폰을 받았다고 해서 자신에게 전화를 받아야 할 의무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이루카는 더 이상 그 하타케 카카시와 엮이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루카는 이 삼일 간 진짜로 전화가 오면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키스를 했고, 핸드폰을 받았다고 해서 그게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는 증거는 아니야.)

이루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문득문득 입 안 점막으로 전해지던 숨과 감촉, 열기 같은 것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허리를 꽉 감싸 안던 단단한 팔의 안정감도 생각났다. 생각만해도 머리가 멍해졌다. 기습 뽀뽀를 당했을 때는 어쩔줄을 몰라서 허겁지겁 했었는데 막상 키스를 하고나서는 이런 상태였다. 그때의 감촉이 재생될 때마다 이루카는 핸드폰을 돌려줬어야 했다고 몇번이나 후회했다. 때늦은 후회였지만.

-그걸 이제서야 알겠어? 나 지금 수작 부리는 거야. 너랑 연애 좀 해보려고.
-봐봐 웃으니까 이쁘잖아.
-너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큰일났다. 나, 진짜 너 못놓겠다.

이루카는 하타케 카카시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눈을 꾹 감았다. 이건 당연한 거다. 그런 사람한테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나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고 얼굴이 뜨거워 지는 거다. 설레는 것도, 자꾸 생각이 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 남자를 좋아해서 그런게 절대 아니었다.

착각하면 안된다고 되뇌이는 이루카는 어디까지나 제 감정에 냉정했다. 제 감정과 생각을 따로 분리해내고 선을 긋는 것은 이루카의 장기이자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이루카는 제 감정에 특별한 이름을 붙이기 보다는 그것을 일반화 시키는데 익숙했고, 따라서 특정한 누군가가 좋다거나, 혹은 밉다거나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이 덕분에 이루카는 사람에게서 상처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 누군가와 깊게 관계를 이어갔던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역시 전화는 받지 않는 게 좋겠지.)

이루카는 엎드린 채로 카페의 벽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지근하지만 확실하게 쌓여가고 있는 피로가 어깨로 몰려들었다. 적당한 내부 온도와 졸음이 겹쳐 깜빡 잠이 들뻔 했을 정도였다.

“이루카, 뭐해? 자는거야?”

이루카는 누군가가 제 등을 툭 치는 느낌에 그제서야 허리를 들었다. 이루카의 근처에 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아, 텐조선배...오셨어요?”

이루카가 텐조라고 부른 남자는 현재 교육대학 단대 회장이자 이루카의 두 학년 선배였다. 얼마 전에 이루카에게 과외 자리를 소개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텐조는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백팩을 의자에 걸고서는 이루카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 앉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근데 너 얼굴 빨개. 어디 아파?”
“아뇨. 괜찮아요. 좀 더워서.”
“정말 덥긴 덥다.”

텐조는 메뉴판을 들고 온 아르바이트 생에게 얼음을 가득 넣은 초코라떼를 주문했다. 그는 이루카의 앞에 놓인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보고서는 혀를 내둘렀다.

“그 쓴 걸 어떻게 먹어? 나는 도저히 커피는 못마시겠더라고.”
“처음엔 저도 그랬는데 그래도 마시다 보니 익숙해졌어요.”

카페에서 제일 싼 메뉴를 고른 것이 핫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된 시작이었다고는 말하지 않고 이루카는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원래 이루카는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다. 학교 행사에는 일절 참여한 적도 없었다. 이루카의 아르바이트 핑계는 이미 과에서 유명했다. 이루카는 그것이 변명같은게 아니라고 해명하지도 않았다.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명문대라서 그런지 부잣집 자제들이 많아서 이런 이루카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어차피 드물었다. 되려 학생들 사이에 애교심(愛校心)이 너무 강한 탓에 학교 일에는 전혀 관심을 쏟지 않는 이루카는 금새 아웃사이더로 전락해버렸다. 애인대행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줬던 무즈키는 워낙에 넉살도 좋고 같은 조가 된 적이 많아서 이야기를 섞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 역시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교우 관계를 쌓은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 이루카가 텐조를 알게 된 것은 굉장히 특별한 일이라고 밖엔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그날은 수학교육과 마당사업이 있는 날이었다. 텐조가 단대 회장에 당선되고서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1학년들이 주축이 된 그 마당사업의 존재를 이루카는 당일 게시판 벽보를 통해서 알았다. 간단한 주전부리들을 직접 준비해서 과 사람들끼리 나누어 먹는 그런 행사인 것 같았다. 마당사업이 펼쳐진 천막에는 맥주 박스도 한가득 쌓여 있었다. 텐조는 직접 팔을 걷어 부치고 튀김을 튀기고 있었다. 주변에 후배들이며 선배들이 새까맣게 몰려 있었음은 두말할 것 없었다.

다음 수업을 위해 건물을 빠져나오던 이루카는 제 과 마당사업을 보고서도 데면데면 했다. 모르는 척 그 앞을 빠져지나가려 했던 찰나였다. 누군가가 이루카의 이름을 부르면서 팔을 잡았다. 텐조였다. 텐조는 손에 들고 있던 튀김 접시를 이루카에게 내밀었다.

“일학년 우미노 이루카 맞지? 이거 먹고 갈래?”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서, 이루카는 수업 핑계를 대고 그 팔을 뿌리쳤다. 자신을 잡았던 사람이 단대 회장이며 제 두 학년 선배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왜 그 선배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까. 선배이면 후배들의 이름을 다 아는 걸까.

이상하게도 그 날 이후로 텐조는 이루카의 일에 얽혀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은 인사부터였다. 텐조는 교정에서 이루카가 보이면 꼭 붙잡고 인사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학과 행사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엠티며 선후배 교류회며, 이루카는 한번도 가지 않았지만 텐조는 끈질겼다.

처음에는 오지랖이 넓은 이상한 선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가끔씩 같이 차를 마시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급격하게 허물이 없어진 것은 텐조가 과외를 주선해주겠다고 했던 학기말 전후였다.

“과외는 할만 해?”
“네. 할만해요.”
“나루토 말 더럽게 안듣지? 숙제도 안해오고 뺀질거리기는 엄청 뺀질거릴텐데.”
“그래도 솔직하고 귀엽잖아요.”

이루카는 제 첫 제자라고도 할 수 있는 노란머리 중학생을 떠올렸다. 나루토는 중학생이라 그런건지, 본성이 그런건지 틀에 맞춘 것을 죽어도 싫어했다. 공식을 외우고 그대로 푸는 것은 못했지만 때때로 기발한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내는 탓에 놀라는 일이 많았다. 어쩌면 나중에는 정말 수학을 잘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루토 생각에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고 있으면 텐조가 문득 입을 다물고 이루카의 얼굴을 빤히 쳐다봐왔다.

“왜 그러세요?”
“아.....아무것도 아냐. 날이 덥네.”

텐조는 아이스 초코라떼의 얼음을 으드득 씹으면서 약간 상기된 얼굴을 돌렸다. 갑자기 딴청을 피우기 시작한 텐조 때문에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루카는 촉박한 시간을 확인하고서는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 왜 부르신거예요?”

이루카의 질문에 텐조의 입술이 삐죽였다.

“선배가 후배랑 차 한잔 마시고 싶은 것도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해?”
“그건 아니지만......”
“너 약속 했잖아. 그것 때문에 불렀어. 과외 잘 되면 내 소원 하나 들어준다며.”

확실히 그런 약속을 하긴 했었다.

“저랑 차 마시는게 소원이었어요?”
“그럴리가 있어? 이거 봐.”

텐조는 가방 앞주머니에서 접힌 에이포 용지 한장을 꺼내 이루카에게 내밀었다. 건네 받은 종이를 펼치자 ‘MT공지’라는 큰 글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아래로 일정과 참가비용 따위가 간결하게 적혀 있었다. 이루카가 표정을 굳히고 텐조를 바라보면 텐조는 결심했다는 듯 제 할말을 쏟아냈다.

“다음주 주말에 과 친구들 몇명 모여서 계곡 가기로 했어. 많이 가는 건 아니고 그냥 소수로. 아직 엠티 한번도 안가봤지? 이번에 같이 가자. 너 회비는 내가 벌써 냈어.”

텐조의 마지막 말에 이루카는 반발했다.

“선배가 왜요?”
“내 소원이라고 했잖아. 그냥 오기만 와달라고 그러는거야. 약속 했잖아 너. 소원 들어준다고....이틀이나 알바 빼야 하는 건 알지만 그래서 과외 소개해줬던 거야. 참가비 얼마 되지도 않아. 너 알바 빼는 손해도 있을거 아냐. 연합엠티도, 중간고사 끝나고서도, 방학 직전에도 엠티 있었는데 다 못온다고 거절했었지?”

엠티 계획이 세워질 때마다 텐조가 이루카의 뒷꽁무니를 쫓아다녔던 것은 사실이었다. 아웃사이더로 지내는 후배가 그렇게 안쓰러워 보였을까. 하지만 되려 혼자 있는 편이 이루카는 편하고 좋았다. 학교 공부랑 아르바이트를 오가는 단순한 생활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벅찼다. 이루카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제 손안에 있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가자. 어?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애원하는 말에 이내 고개를 들면 텐조는 눈썹을 내리고 사정하는 듯 이루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루카는 잠시 고민했다. 주말 아르바이트를 빼야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일단 이루카는 과 사람들을 잘 몰랐다. 텐조가 몇명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나 누가 누구인지 떠올리기 어려웠다. 물론 텐조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 것은 빈말은 아니었다. 이루카는 평소에 텐조를 오지랖 넓은 선배 쯤으로 생각하는 일이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못지않게 고마운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동기, 선배, 교수 등 학교 뿐만 아니라 제 생활을 통틀어 텐조만큼 이루카의 일상을 챙기는 사람은 사실 한명도 없었다.

이루카는 망설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텐조 선배 요즘 야간 아르바이트 하시죠?”
“아......응. 공사장 야간 알바 말하는 거야?”
“그거 시급 많이 줘요?”
“야간 작업이라 아무래도 그렇지.”
“사람은 많이 써요?”
“어, 로테이션이 빠르니까. 근데 그건 왜?”
“엠티 갔다와서 그 아르바이트 소개해주시면 갈게요.”
“뭐? 아르바이트를 또 늘리려고?”

이루카의 말에 텐조는 난색을 표했다. 안 그래도 벌써 일중독이라도 걸린 건가 걱정이 들 정도로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는 이루카였다. 학기 중에도 저녁에는 꼭 아르바이트를 하더니 방학이 되고나서는 낮이고 밤이고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었다. 원룸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한참을 기다리지 않으면 연락한번 하기도 어려웠다.

이루카는 자신의 일에 대해서 깊게 말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텐조는 이루카가 왜 그렇게 아르바이트에 목을 매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왜 그렇게 힘들게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한마디라도 해주면 좋을텐데, 텐조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래 한다는 것도 아니고 딱 한달만 하면 돼요.”

하지만 이루카의 이 말에 결국 텐조는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더 늘어날 것이다. 그건 텐조에게는 꽤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문득 텐조는 카페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낯선 스마트 폰에 시선을 주었다. 모르는 척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이루카의 맞은편에 앉았던 순간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었다.

“근데 이 핸드폰, 너 거야?”

이루카는 황급히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핸드폰은 텐조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텐조는 핸드폰을 이리저리 살펴보고서는 감탄했다. 출시된지 얼마 되지 않은 최신형 스마트폰이었다.

“핸드폰 샀으면 진작에 말해주지 그랬어?”

섭섭하다는 듯한 텐조의 말투에 이루카는 망설이면서 말했다.

“......제가 산거 아녜요.”
“그럼?”
“그냥....누가 줬어요. 저 핸드폰 살 생각 없다고 했었잖아요.”
“누가 줬는데?”
“그냥......좀 알게 된 사람이 있는데.”
“조금 알게 됐는데 선물로 핸드폰을 줘?”

텐조가 미간을 구기면서 물었다. 꽤나 과잉반응이었는데도, 이루카는 텐조의 의문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돌려주고 싶지만..... 전화가 오면 핸드폰을 돌려주겠다고 해볼까. 그런 생각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텐조가 핸드폰의 화면을 터치하기 시작했을 때 이루카는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어...!”
“잠깐만 기다려봐.”

신호음이 몇번가고서 텐조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는 핸드폰에 뜬 전화번호를 보더니 씨익 웃고는 이루카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켜진 핸드폰 화면으로 새로운 발신 기록이 떠 있었다.

“그거 내 번호야. 뭐가 어찌 됐든 너 핸드폰 생겼으니까 이제 좀 편하게 연락 할 수 있겠다. 그동안 얼마나 불편했는 줄 알아?”

텐조가 너무 기쁘게 웃었기 때문에 이루카는 뭐라 더 말하지도 못했다. 그 이후에 그는 이루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이루카를 아르바이트 장소까지 데려다주었다. 번화가 귀퉁이에서 연락하겠다고 말하는 텐조에게 이루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엠티 참가비를 스스로 내겠다는 말은 잊지 않고 했다. 텐조는 됐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이루카의 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더운 불판 가득한 고기집에서 정신없이 일한탓에 지친 몸을 간신히 챙겨 집에 돌아오면 열시 반이었다. 땀에 절은 셔츠부터 벗어 던지고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카락을 털면서 이루카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새 새로운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다음주 기대된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짧은 문자였지만 그 짧은 문자에서 왠지 모르게 텐조의 환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루카는 쿡쿡 웃었다. 이 선배, 오지랖 넓다고는 생각했지만 제가 엠티를 가겠다고 한 게 그렇게 좋을까. 순간 하타케 카카시가 주고간 핸드폰에 다른 사람의 번호를 입력하고 쓰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텐조 선배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슥삭 덮었다. 어느새 핸드폰 시계는 10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루카는 그새 얼굴을 굳히고 얼른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이루카는 습관처럼 저녁 뉴스를 보면서 드라이어로 머리카락을 말렸다. 그런데 평소라면 있는지도 신경쓰지 않았을 뉴스 화면 귀퉁이 시계표시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일분 일분 지날 수록 이상한 압박감이 들었던 것은 덤이었다. 이루카는 아예 티비를 꺼버리고 드라이에 집중했다. 물기 하나 없이 마른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을 때 시계는 11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화 왔을까?)

몇시에 전화하겠다는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하지만 이전의 전언 때문이었는지 이루카는 막연히 11시에 전화가 올거라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루카는 그제서야 미적미적 책상위로 손을 뻗었다. 스마트폰의 홈버튼을 누르면 부재중 전화를 알리는 메세지가 떴다. 메세지는 한개가 아니었다. 11시에 최초로 전화가 왔고 이루카가 막 핸드폰을 들기 직전에도 한 번 온 것 같았다. 이루카는 빤히 부재중 문자를 바라보았다.

전화를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사실 이루카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간에도 틈만나면 전화 생각이 났다. 전화를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에 다시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 심장이 멎을 뻔했다.

(어떡하지.)

손이 차가워지고 목이 아플정도로 긴장이 됐다. 전화 따위, 받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는것이 저한테도 좋은 일이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낮에 했던 결심은 어디로 갔는지 그냥 대책도 없이 손가락이 움직였다. 빨리 받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전화가 끊길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을 때였다. 통화가 연결되고서 이루카는 천천히 귓가에 전화기를 댔다.

“....여보세요.”

목이 말라서 그 한마디 하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다. 잠시간의 뜸을 두고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응, 나야.

그 순간 이루카는 작게 숨을 삼켰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온 것이 무색하게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또 전화 안 받으면 이번에는 어쩌나 했어.
“........”

좋아하는 거 아니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전화 한번 받아 준다고 좋아하게 되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좋아하게 되는거게? 좋아하는 거 아니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정신차려.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낮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루카는 주문처럼 그렇게 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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