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KAIRU ONLY 페러렐 90% 이상 분포 주의
※표시가 붙은 글은 폭력 및 성적 묘사를 포함합니다. 표시가 없어도 기본 어른테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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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또 일주일이 지났다. 이루카는 하타케 카카시를 생각해낼 때마다 분노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분노했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분노를 하든 뭘 하든 의미가 없지않나. 처음 느낀 감정은 아니었다. 하타케 카카시를 처음만났던, 그 웃기지도 않았던 애인대행 알바를 한 후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것을 이루카는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이 그랬다. 학교 도서관에 가고 아르바이트를 도는 생활에서 이루카가 하타케 카카시를 만날 가능성은 0.1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그때도 이루카는 그 남자의 제멋대로에 분노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루카는 이내 그 남자를 잊고 있었다. 접점이 전혀 없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이루카는 개에게 물린 셈 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멋대로 남의 볼을 꼬집고 뽀뽀까지 하고 간 그 하타케 카카시를 생각하면 여전히 얼굴이 빨개지고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또 바쁘게 살다보면 잊혀지지 않겠는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그 이후로 하타케 카카시는 이루카를 찾아오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그 남자가 찾아오지 않으면 연결되지 않는 관계. 그런데 무슨 연애를 하자고. 이루카는 그렇게 생각하고서는 쓴웃음지었다.

사실 이루카는 하타케 카카시가 다시 자신에게 접근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놀리고 하루 데리고 놀았으면 충분한 거 아니야? 한순간에 놀잇감같은 게 되어 버리는 이루카로서는 서글픈 일이었지만 애초에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만한 사이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었다.

(나 정말 귀찮은 사람한테 걸린거구나.)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이루카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밤 늦게 집에 돌아오던 날이었다. 집 앞에 낯선 남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검정 머리카락에 검정 수트를 입고, 불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복도에 장승처럼 우뚝 서 있었는데, 처음에는 무슨 저승사자인 줄만 알았다. 이루카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눈을 껌벅이고 있으면 그 사람이 이루카를 향해 몸을 돌려 물었다.

“우미노 이루카씨 맞으십니까.”

이루카는 그 남자의 묘한 박력에 홀린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는 주제에 이상하게 무서운 눈빛을 하고 있는 남자였다. 목소리를 들으니 사람은 맞는 것 같긴 한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 없는 시선은 영락 없이 귀신이랑 똑같아서 무섭긴 매한가지였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야마토라고 밝히면서 하타케 카카시의 부하직원이라고 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하타케 카카시의 이름이 나온 순간 이루카는 어깨를 바싹 긴장시키고 뒤로 물러섰다. 저승사자인줄 알고 무서워했는데 어쩌면 저승사자보다 더한 게 온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루카는 무의식적으로 한 두 발자국 더 뒷걸음질을 쳤다. 이젠 상관 없는 사람인 셈 치려고 했는데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런 사람까지 보낸담.

사실 요 며칠 이루카는 되는 일이 없었다. 학교 선배의 도움으로 최근 간신히 구한 과외집에 가서도 실수 연발이었다. 중학생 수준의 수식을 틀리기도 하고 예제 문제를 풀어주면서도 답이 안나와서 식은땀까지 뻘뻘 흘렸다. 괴외집 학생인 나루토가 어디 몸이라도 안좋은 것 아니냐며 걱정해 준 말에 괜찮다며 애써 웃어보이고 견딘 두시간이 천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펍에서도 포스 기계를 꺼버리는 바람에 손님을 계산대에 한참 세워둔 일까지 있었다.

하타케 카카시가 아무 생각없이 가볍게 날리고 갔을 그 애같은 뽀뽀는, 사실 이루카에게 생각보다 훨씬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사는게 바쁘다는 것을 핑계로 아직 여자손 한번 못잡아보고 연애라는 것과 담을 쌓고 살았던 이루카였다. 이루카 본인이 아직 누군가를 사귄다거나 할 생각이 없었던 탓이 컸다. 미팅할 시간에 차라리 아르바이트 하나 더 뛰는게 이루카에게는 훨씬 득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한 남자가 그런 이루카의 생활을 완전히 깨놓고 갔다.

검은 수트의 남자는 얼굴을 뻘겋게 만들고 씩씩거리는 이루카에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받아보시면 압니다.”
“싫어요. 그 사람한테 도로 가져가세요.”

이루카는 그 상자가 뭔지 확인도 하지 않고 푸드득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 야마토라는 남자는 과연 하타케 카카시의 부하다웠다. 남자는 기함을 하는 이루카는 제 알바 아니라는 듯이 굴었다.

“받으실 때까지 여기 있겠습니다.”
“왜, 왜요? 가세요! 제가 쫓아냈다고 하면 되잖아요!”
“우미노씨가 받아주실때까지 돌아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몰라요! 맘대로 하세요!”

이루카는 현관앞에 서 있는 남자를 제치고 키로 문을 땄다. 쾅하고 문을 닫았는데 그 야마토라는 사람은 별로 상관 없다는 듯 여전히 상자를 들고 이루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유상종이라고 끼리끼리 모인건지. 이루카는 혀를 차고 늦은 저녁상을 차렸다. 마지막 남은 카레를 득득 긁어서 대충 밥을 먹고 자정 뉴스를 봤다. 그러나 그 마음이 편할리가 없었다. 이루카가 현관을 다시 난폭하게 열면 야마토라는 남자는 아까전과 같은 자세로 여전히 서 있었다.

사실 그 무표정한 남자를 보면서 한편으로 동정심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얼마나 제멋대로인 상관을 뒀으면 이 열대야에 수트를 입고 이딴 웃기지도 않은 심부름이나 하고 있는거야? 부하직원을 이런 일에까지 쓰는 그 사람은 역시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야마토라는 남자는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는 밤새 현관 앞에 서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이루카는 마지못해 손을 뻗어 상자를 건네 받았다. 남자는 인사를 하고서는 금새 떠나갔다.

이루카는 망설이면서 포장된 박스를 뜯었다. 박스 안에는 최신 스마트폰 한대가 들어 있었다. 하타케 카카시의 것과 똑같은 은색 스마트폰이었다. 상자 안에는 스마트폰 뿐만 아니라 쪽지도 함께 등봉되어 있었다.

직접 주고 싶었는데 미안. 11시에 전화 걸게.

날렵한 필체로 적힌 쪽지를 보고서 이루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이루카는 핸드폰이 없었다. 대학생이 되면 사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다달이 내야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가끔씩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원룸 사무실에 있는 전화를 이용하면 중요한 연락을 놓치는 일은 없었다. 정말 필요하게 될때까지는 쓸데없는데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최신 스마트폰을 선물 받을 줄은 몰랐다. 물론 기쁜 선물은 아니었다. 남들이 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고 해서 자신도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치부가 드러난 것 같은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이쯤되면 적어도 남자가 이루카와 뭔가 커넥션을 가지고 싶어한다는 것은 이루카도 알 것 같았다. 연애라는 걸 진짜로 하고 싶어한다는 것도 저번에 느꼈다. 그래도 이루카가 원하는 연애는 이런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다 가진 것같은 남자와 아무것도 없는 자신 사이에 연애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진심이라고 해도, 또 머지않아 질려서 가버릴 것이다. 더더군다나 이루카는 누구에게 내세울만한 장점 하나 없는 그냥 보통 남자애였다. 아니, 보통이라고 말하는 것도 너무 과분한 것 아닌가. 그런 자신이 그 남자에게 진심이 된다니 그거야말로 코메디처럼 느껴졌다.

이루카는 스마트폰을 켜지도 않고 그대로 상자에 집어 넣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뽀뽀를 하고서 기쁜듯이 웃고 있었던 남자의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시큰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루카는 그 남자가 제 태도에 화를 내면서 빨리 그 변덕을 접어줬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내가 좀 더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이루카는 무심코 생각했다. 지긋지긋한 돈에 얽매이는 일 없이 그냥 부모님이 주는 용돈으로 학교를 다니는 그런 생활. 미팅에 열을 올리고 연애에 꿈을 꾸는 보통 스무살들처럼 아무 걱정 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다닐 수 있는 그런 나날. 그러면 돌연 나타난 그 잘난 남자의 연애하자는 말에 홀딱 넘어가서 순진하게 마음 설레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여 그 남자가 순간의 변덕을 부린것이었다 해도 엄청난 데미지를 받는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사실 이루카는 그 ‘보통의 생활’이라는 것을 꿈꾸며 살지는 않았다. 왜 나는 그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없는 걸까 좌절하지도 않았다. 그냥 주어진 상황에 맞춰서 열심히 살았다.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막연히 그렇게만 생각했다. 꿈꾸면 꿈 꿀수록, 원하면 원할 수록 좌절하게 된다는 것을 이루카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루카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미간을 찌푸리며 간신히 참았다. 알지도 못하는 왠 토끼새끼를 닮았다며 경솔하게 다가와서는, 새삼스럽게 자신에게 이런 것을 생각하게 하는 그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


이루카가 월, 수, 금 오후에 일하고 있는 곳은 번화가의 한 펍이었다. 펍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가벼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한때 대기업에서 일했었다는 젊은 사장은 이 펍을 금전적 여유가 있는 주변 직장인들을 타겟으로 해서 오픈했다. 펍 근처에는 지역 법원이나 대형 은행도 몇개나 있고 무슨무슨 협회니 우량 벤처기업이니 하는 회사들이 많아서 손님 수급은 꽤 용이한 편이었다.

사장은 이루카를 크게 마음에 들어했다. 면접때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청년이 약간 못미더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원래 여러가지 아르바이트에 단련될 대로 단련된 이루카였다. 그만큼 눈치가 빠르고 기억력이 좋았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 이제 일주일 남짓이 지났을 뿐인데 이루카는 일하는 직원의 얼굴과 이름은 물론이고 단골 손님들까지 대개 기억하고 있었다. 한번 온 손님은 잊지 않는다는 것도 또한 훌륭한 점이었다.

그러나 이루카는 드물게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잔 실수를 반복하다가 결국 유리잔을 깼다. 깨진 유리를 치우고 있던 이루카의 뒤로 사장이 다가섰다.

"이루카 무슨 일 있어? 오늘은 뭔가 집중이 안되는 느낌인데?"
"아.....진짜. 죄송합니다."
"신경쓰지마. 그정도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잖아. 그나저나 피곤해 보이는데 오늘은 일찍 갈래? 다음 타임 일하는 친구도 벌써 와 있고. 진짜 피곤해보이는데."
"아녜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괜찮아요. 이거 치우고 잠깐 화장실 갔다와도 돼요?"
"그래 갔다와."

이루카는 사장을 향해 애써 웃어보이면서 허리를 일으켜 화장실로 갔다. 허리에 두르고 있었던 검정색 앞치마를 푸르고 미색 세면대에 손을 지지했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면 약간 푸른끼가 있는 조명등 때문에 파리한 안색이 드러났다. 이제는 슬슬 한계였다.

이루카가 하타케 카카시의 쪽지를 무시한지 이제 열흘 가까이 지났다. 이루카는 하타케 카카시가 준 핸드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11시에 전화하겠다는, 그 메시지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루카는 여기서 더 그 남자에게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 다음이었다. 이루카가 하타케 카카시를 무시하기 시작한 이후로 커다란 선물박스들이 집으로 배달되어오기 시작했다. 이루카의 방 한켠에 쌓인 8개의 선물박스는, 하타케 카카시가 이루카에게 핸드폰을 던져준 후 지난 날 수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솔직히 상당한 질량을 자랑하는 박스더미는 이루카의 좁은 방에서 민폐 이외 그 무엇도 아니었다. 열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고급스러운 포장지를 미뤄 봤을 때 이루카가 언감생심 쳐다도 못보는 물건들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어쨌든 이루카는 그덕분에 야마토라고 하는 남자의 얼굴을 몇번이나 더 볼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선물을 전달하면서 마지막에는 꼭 이렇게 말을 했다.

“오늘 밤 11시에 전화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루카의 집에 찾아왔던 것은 이 야마토라는 남자 뿐만은 아니었다. 흰 얼굴과 노란색 머리카락을 가진 웬 외국 여성이 현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이루카는 거짓말 안보태고 뒤로 넘어질 뻔 했다. 그 여성은 (대개 일본사람들이 그렇듯) 약간의 외국인 공포증을 보이는 이루카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소개를 했다. 그녀의 이름은 바네사였으며 지금은 제 주인님의 자잘한 신변을 돌보고 있다고 했다. 주인님이라고 함은, 분명 하타케 카카시일 터였다.

(21세기 일본에 아직 그런 말이 쓰이고 있다니....)

바네사라고 하는 그 여성은 독일억양이 강한 영어를 썼다. 처음에 이루카가 바네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꿈벅이고 있으면, 약간 어색한 일본말을 써 주었다. 단어와 단어가 잘 연결되지 않았지만 못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외국인의 압도감 때문에 이때만큼은 이루카는 순순히 그녀가 내미는 박스를 건네 받았다. 그러면 그녀는 야마토라는 남자와 같은 말을 던지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더 이상 상관하기 싫은 자신의 마음을 그 남자는 모르는 것 같았다. 이루카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신경질적으로 핸드폰 박스를 개봉했다. 배터리가 나가있는 핸드폰에 충전기를 연결하고 전원 버튼을 켰다. 알록달록한 그래픽과 약간 경망스러운 알림음이 울렸다. 이윽고 부재중 전화를 알리는 메세지가 떴다. 하타케 카카시의 전화가 분명했다. 핸드폰 시계는 10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정각 11시에 핸드폰 벨이 울렸다. 이루카는 무슨 결의라도 한 듯 굳게 심호흡을 하고 초록색 버튼을 터치했다.

“....”
-이루카? 드디어 받았네. 끝까지 안받으면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이루카가 아무런 말도 없이 있으면 수화기 건너편에서 하타케 카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루카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제가 이런거 싫어하는 거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이렇게라도 안하면 네가 나를 보기나 하겠어?
“......”

남자의 고집에 이루카는 위가 다 아팠다.

“전 댁이랑 연애같은 건 할 생각 전혀 없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리고 이 선물들 가져가세요. 저희 집에 그런 거 둘 공간 없어요."
-당장 연애하자고 이러는 거 아니랬잖아. 그리고 물건 회수는 안해. 전화 안받은 벌이라고 생각해.
"......이러다 제가 돈 바라고 막 들러 붙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이루카는 진심으로 그런 걱정이 들었다. 설마 자신이 그럴리는 없지만, 자신이 아니라 다른사람이었다면 벌써 이 남자에게 아양을 떨고 있었을 것이다. 돈에 대한 사람의 탐욕이 사람을 얼마나 망가트리는지 이루카는 알고 있었다. 사실 이루카가 있었던 고아원은 파산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운영에 끼어든 후원자가 고아원 자리를 탐내면서 일이 꼬였다. 그 후원자 뿐만 아니야. 돈이라면 인간이 가진 모든 무형의 가치를 포기해버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았다. 고등학생 시절 임금을 떼인 적이 몇번이더라. 이루카는 가슴이 답답했다. 이윽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돈에 얽매여준다면 이쪽은 차라리 대환영이야. 이렇게 너 쫓아다니면서 애먹을 필요 없고.
"......."
-원래 돈이라는 건 많이 있으면 있을 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거야. 네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가져다 써도 좋아. 돈이라면 네가 평생을 길바닥에 뿌려도 다 못뿌릴 정도로 있어.

이루카는 이때 진심으로 화가 났다. 돈으로 얽혀서는 진정한 인간관계는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남자에게 구구절절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대신 저도 모르게 모난 말투가 튀어나왔다.

"지금 제 앞에서 돈자랑해요?"

이루카가 이렇게 물으면 카카시는 잠시 침묵했다. 침묵 후에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이루카는 순간 숨을 죽였다.

-어차피 네가 돈 같은 거에 좌지우지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아.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진 말. 그 말이 돌연 의도치 않게 가슴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아플 정도로 이루카의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루카는 그 순간에 처음으로 남자의 얼굴도 그의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급스러운 옷도 보지 않고 제가 오롯이 상대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꽤 이상한 감각이었다.

-이런 건 애초에 비교할 거리가 못돼. 돈이 아무리 많은들 너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이루카는 약간의 두통과 함께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쾅쾅-

이루카의 집 현관문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할말을 잊은 이루카는 잘됐다 싶어서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겠다고 하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평소처럼 그냥 관리소 사람이겠거니 한 것이 잘못이었다. 이루카는 제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을 집어 삼켰다.

“안녕.”

현관 앞에, 이루카의 손에 있는 것과 같은 기종의 핸드폰을 쥐고 하타케 카카시가 서 있었다. 놀란것도 잠시, 이루카는 그대로 현관문을 닫았다. 그러나 현관문 사이로 발을 끼워 넣은 남자가 그대로 문을 열어제쳤기 때문에 이루카는 끌려나오다시피 남자와 마주서야 했다. 이루카는 입술을 씹어잡으면서 제 등뒤로 현관문을 닫았다. 이루카의 원룸은 현관문 밖에서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그런것까지 이 남자에게 까발려지고싶지 않았다.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연락을 안받으니까. 오늘도 안받으면 보쌈이라도 할 생각이었지. 받아서 다행이야.”

남자의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골목길에 본적 없는 외제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도대체 차를 몇대나 가지고 있는거야. 이럴줄 알았으면 전화 받지 말걸. 이루카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제 그만 하면 안될까요. 저 힘들고 지쳐요.”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닌데 왜?”
“그걸 지금 몰라서 물어보세요?”
“.....”
“저 좀 그냥 내버려두세요. 전 제 앞가림 하는 것만도 바쁘고 사는 것 자체가 난관이예요. 연애고 사랑이고 저한테는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예요. 아직은 그딴거에 시시덕거리고 싶지 않아요. 좋다고 해주셔도 저는 난감해요. 저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그냥 한번만 봐주면 안돼요? 저 말고 댁 좋아해 줄 사람 많잖아요. 왜 여력도 없는 불쌍한 애 휘두르려고 해요?”
“.....”

남자는 어느순간부터 이루카가 하는 말을 대꾸도 없이 듣고 있었다. 이루카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못본 며칠새, 남자의 얼굴은 꽤 많이 핼쓱해진 것 같았다. 머리는 조금 헝클어져 있었고 입고 있는 수트도 넥타이를 늘어트린 채 단정한 꼴은 아니었다. 제 행색을 보고 있는 이루카의 시선에 남자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고서는 큰 손으로 날카로운 턱을 두어번 쓸었다.

“요즘 좀 바빴어. 여기 몇번 왔다갔는데, 야마토 알지? 그 새끼가 지 주제도 모르고 가끔 이렇게 굴려.”
“......”
“보쌈이니 뭐니 거짓말이야. 그냥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왔어.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피로회복이 되느니 뭐 그런거 있잖아. 솔직히 그딴게 어딨냐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아무래도 진짜같네.”

남자의 말에 이루카는 쏘아부치던 것도 잊고 고개를 숙였다. 그저 웃는게 보고 싶다며 양 볼을잡혔을 때처럼 무심코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았다. 이루카는 잠깐 시선을 헤메다가 현관 문고리를 잡았다.

“.....얼굴 봤으니 그럼 이만 가보세요. 이젠 다시 오지 마시구요. 핸드폰이랑 이런건 주소 알려주시면 택배 부쳐드릴게요.”

제 할말만 하고 황급히 뒤돌아서는 이루카의 어깨를 남자의 손이 붙들었다. 어두운 복도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주황색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비춰지는 남자의 얼굴에 이루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이루카는 남자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머리는 당장 여기서 벗어나라고 경종을 울리는데 주책없이 심장이 떨려서 이루카는 아무것도 못했다. 시선을 피하는 이루카를 보면서 남자는 말했다. 얼굴이 가까워서, 대화는 거의 속삭이는 듯한 것이 되었다.

“....내가 네 생각처럼 변변치 않은 놈인 건 맞아. 처음에 봤을때 호기심 비슷한 걸로 너랑 한번 놀아볼까 생각했었던 것도 사실이야. 그래서 지금 내가 너를 가지고 놀다가 버릴거 같아?”

이루카는 그저 제멋대로인 것 같은 이 남자가 의외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다.

“.....그렇지 않다고 장담은 못하죠.”
“보고싶었어 진짜로. 솔직히 나도 내가 왜 이러나 황당할 지경이야.”
“...........”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런건 아직 저에겐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먼 훗날의 연애 대상도, 적어도 이런 눈돌아가게 멋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주제도 모르고 많은걸 바라면 틀림없이 다치는 건 이루카 자신이었다. 이루카의 이런 생각은 이 남자를 앞에 두고도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도 가까운 숨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저번에 남자에게 당했던 그 장난스러운 키스나 상쾌한 웃음이 이루카의 머릿속을 뛰어다녔다.

이런 상황은 정말이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사태, 예상하지 못했던 거 아니잖아 우미노 이루카. 이루카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사람 앞에서라면 누구나 얼굴을 붉히고 설레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아무리 심장이 뜀박질을 한들 이런거에 일일이 일희일비하면 안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키스해도 돼?”

가까이서 이루카를 응시하고 있던 남자가 망설이는 투로 말했다. 솔직히 지금까지 모든 걸 다 제멋대로 했으면서 새삼스레 동의를 구하는 것이 웃겼다.

“...싫어요.”
“나랑 있는게 부담스러워?”
“댁을 제가 좋아하게 될거라고는 생각 안해요.”
“그래. 그럼 그냥 어디 지나가던 개새끼가 와서 껄떡대는 거라고 생각해. 어차피 나 너한테 신용도 바닥이잖아.”

닿을 듯 말 듯했던 입술이 닿았다. 촉감 조차 떠올릴 수 없었던 지난번의 기습뽀뽀와는 차원이 다른 키스였다. 이루카는 저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문득 이게 제 첫키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억울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그런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부드러운 입술이 갈라지고 혀가 섞이면 이내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까끌거리면서도 부드러운 혀가 입안을 메우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약한 입천장이며 혀 밑을 애무했다. 생경하면서도 몸이 마비될 것 같은 저림에 이루카는 저도 모르게 우는 소리를 냈다.

“흐...”

이루카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은 어느새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주머니에 있었던 남자의 빈손은 이루카의 목덜미에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입술이 떨어지면 이루카는 멍청하니 빈 눈으로 남자를 응시하면서 입 안에 넘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루카가 삼킨건 분명 5할은 저 남자의 타액이 분명했다. 이루카는 손이 달달 떨려서 아무것도 못할지경이었다. 예민해진 몸은 여름 밤바람이 시원하다고 느낄 정도로 뜨거웠다. 남자는 멍청해진 이루카를 와락 안고서는 제멋대로인 것을 지껄였다.

“큰일났다.”
“.....”
“나, 진짜 너 못놓겠다.”

그때 터질듯이 뛰고 있었던 것이 남자의 심장이었는지 제 심장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루카는 떨려서 잘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단속하고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절대로...댁이랑 연애는 안할거예요.”

제가 듣기에도 미더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루카는 그 말을 남자가 믿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루카는, 더 이상 이 사람과 가까워지면 안된다고 깨달은참이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정말로 좋아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상관해오려는 남자를 그냥 무시하고만 싶었던 것은 틀림없이 무의식적으로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남자가 말한대로, 이 남자와 연애라는 걸 하고싶게 될 것 같았다. 웃는게 보고싶다며 장난을 치는 남자에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와서는 보고 싶었다고 하는 남자에게, 너는 하나뿐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남자에게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제 뜻을 이루려고 제멋대로 구는 행동들도 귀여워보일 것이 분명했다.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안아주는 이 팔이 기분 좋다고 느끼게 될 지도 몰랐다. 머리와 심장이 그렇게 경종을 울렸다. 이루카는 이번에는 단호히 말했다.

“저는 싫어요.”

그 말에 이루카를 꽉 끌어안고 있는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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