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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시가 붙은 글은 폭력 및 성적 묘사를 포함합니다. 표시가 없어도 기본 어른테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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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그 날은 비가 왔다. 산등성이 너머로 몰려온 검은 구름은 마치 앞으로 일어날 불길함을 암시하기라도 하듯이 음습하고 거칠었다. 다시 겨울이라도 찾아온 냥 얼음처럼 차가운 비가 온 마을을 뒤덮고 단숨에 집어 삼켜 간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날인데 흙바닥을 파내는 둔한 빗소리가 이유도 없이 두렵다. 쏟아지기 시작한 폭우는 그치지 아니하고 삼일을 내렸다. 살갖을 에며 이유도 없이 심장을 옥죄는 비. 귀신 비명 소리를 닮은 빗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소름이 돋은 살갗을 문지르며 문을 걸어 잠갔다. 그 비는 하타케가에도 어김 없이 내렸다. 삭막한 하타케가에 울리는 빗소리는 기괴한 쇳소리를 머금고 유난히도 섬뜩하였다. 그래,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이 하타케가의 어딘가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다. 하타케가의 작은마님 또한 밤 늦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누웠다 다시 일어나기를 여러 번. 흉흉하기까지 한 바람소리와 빗소리의 사이에 인기척을 느낀 것은 이미 삼경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덜컹덜컹.
소름이 돋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공기마저 차갑게 식은 듯 냉기가 돌았다. 이루카는 처음에 제 방 장지문을 흔드는 그것이 귀신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숨까지 멎은 그 순간, 장지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돌쇠였다. 돌쇠는 무슨 일인지 홀딱 젖은채로 차가운 비를 온 몸에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노란 촛불 속에 일렁이는 회색 눈동자는 비보다 차갑게 빛나고.
흰 피부가 창백하게 떠올라 시선을 붙든다. 날카로운 눈매와 눈동자가 가라앉은 모습은 무심코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냉정하였다. 가끔씩, 날짐승같은 사내라고는 생각하였다. 연약한 꽃잎이라도 만지는 것 마냥 조심스럽게 손을 뻗으면서도, 때때로 그 눈빛만은 당장이라도 저를 집어 삼킬 듯 이글거렸다. 그래. 꼭 지금처럼. 이루카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그런 이루카를 보면서 돌쇠는 평소처럼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쑥스러운 듯 어렴풋 지어 보이는 돌쇠의 미소는 아주 멋졌다.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이루카는 그것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천천히 몸이 가까워진다. 이루카는 무슨 일이냐 묻지도 못하고 제게로 다가오는 사내를 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빗물이 웅덩이를 만든다. 확실히 그 날 돌쇠는 조금 이상하였다. 저녁상도 무른 채 멍하니 비오는 하늘만 올려다보며 꼭 어딘가 고장난 사람처럼 굴었다. 설마 돌쇠의 탈이라도 쓴 귀신인가. 이루카는 비명하나 지르지 못하였다. 하긴, 비명을 지른 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맹렬하게 쏟아지고 있는 저 빗소리는 곡성도 삼킬 듯 하였다. 가까이서 무릎을 꿇어 앉는 사내의 서늘한 기백에 이루카는 저도 모르게 뒤로 상체를 기울이며 어깨를 움츠렸다.
“왜, 왜....”
떨리는 심장을 추스르며 묻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끝도 없을 것 같은 침묵. 그 침묵 뒤에 무엇인가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 돌쇠는 그런 침묵을 지키며 손을 뻗어 멍하니 저를 바라보고 있는 마님의 볼에 손끝을 대었다. 상냥한 손가락이 보송보송한 볼을 몇번 쓰다듬고 살짝 벌어져 있는 입술을 건드린다. 이내 먹물이라도 발라 놓은 것 같은 단아한 눈썹과 피부색보다 연한 상처자국이 있는 콧날을 만지기도 하였다. 그 손끝은 창백함을 배반하고 데이기라도 할 듯 뜨거워서 이루카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살짝 내리깐 눈가를 엄지 손가락으로 쓸며 돌쇠는 말하였다. 평소에도 낮은 목소리가 빗물을 먹은 듯 가라앉아 눅눅한 공기를 흔들었다.
“마님. 쇤네가 하였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몸을 감싸고 있는 날 선 분위기와는 다른 차분한 목소리였다. 이루카는 목울대를 한번 울리고는 되물었다.
“.....무슨 말, 말이냐?”
“쇤네는, 마님 것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 말을, 하타케가 작은마님이 어찌 잊었겠는가. 그토록 그리고 그리던 이가 저를 안고 해주었던 그 뜨거운 말을. 귓가를 간지르던 숨결의 감촉과 그 온도까지도 아마 평생 잊지 못하리라. 생각만 하여도 불이라도 붙은 듯 전신이 달아 올랐다. 돌쇠는 여전히 부드러운 손길로 닿는 모든 것이 다 사랑스럽다는 듯 이루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토록 원했던 시선과 손길. 날이 가면 갈 수록 도취된다. 그 시선에 시로잡히면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평소 아무렇게나 넘기고 있는 은색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 흰 얼굴로 빗물을 떨어트린다. 떨어진 물방울이 날렵한 턱선을 타고 흘러내려 옷깃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본 것은 우연이었다. 무심코 볼이 발갛게 달아 오르고, 그리고 입술이 닿았다. 돌쇠는 이로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핥았다. 입술 사이에 끼워 넣고 빨기도 하였다. 이루카는 순순히 입술을 벌려 제 안을 노리는 살덩이를 받아들였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거칠게 저를 범하기라도 할 듯 굴었으면서 입안을 간지르는 혀의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착하고 순하였다. 굳어있는 혀를 안심이라도 시키는 듯이 건드리고 어느새 뒷목으로 들어온 큰 손바닥이 뒷통수와 목줄기를 오가며 이루카의 목덜미를 감싸쥔다. 돌쇠는 사탕이라도 문 마냥 입술을 부드럽게 빨아 먹었다. 빗소리는 여전히 무서울 정도로 거세게 귓가를 때리고 있다. 입술을 살짝 떼고서 돌쇠는 멍하니 저를 올려다 보고 있는 마님에게 물었다.
“마님은 누구 것 입니까.”
대답을 강요하는 것 같은 강압적인 어조는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답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에 이루카는 잠시 머뭇거렸다. 왜 갑자기 돌쇠가 이런 것을 묻는지는 잘 몰랐지만,
“나, 나는....”
답은 너무 빤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다 받고, 그리고서는 제 목숨까지 버릴 각오를 하고,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내던졌다. 천한 종놈인데. 저는 양가집 며느리인데. 시어미와 서방님을 성심껏 모셔야 하는데. 할아버님도 사촌들도 조카들도 실망을 할텐데. 그런데도 이 사내에게 사랑받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몸까지 열어 보였던 것을 정녕 모르고 묻는가. 이미 일은 한참 전에 벌어졌다. 이루카는 그런 것 따위는 이제 무섭지도 않았다. 가라앉은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친다. 이루카는 제 몸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팔을 벌려 눈 앞에 있는 몸에 와락 매달렸다.
“.....나는 네 것이다. 내가 네 것이 아니면 대체 누구 것이란 말이냐.”
말을 내뱉는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 떨림을 가라앉히기라도 하려는 듯 응석을 부리는 아이처럼 가슴팍에 볼을 대고 부볐다. 아주 차가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매달린 몸은 젖어 있었지만, 냉랭하게 식어 있기는 커녕 그 손 끝처럼 뜨겁고 아주 안심이 되었다. 규칙적인 심장소리가 들린다. 돌쇠는 두렵지 않은 것인가. 매달린채 시선을 올리면 돌쇠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이루카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아까전의 흉흉한 기색이 거짓말이었던 것 같다. 이루카는 다시 강하게 등을 끌어안았다. 몸을 밀착시키면 밀착시킬수록 이상하게도 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졌다. 그래서 더 팔에 힘을 주었다. 제 옆에 이 사내만 있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내만 제 옆에 있으면.
“무섭다.”
“무엇이 말입니까.”
“모르겠다. 그냥 다... 빨리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저깟것이 무서울 것이 뭐가 있습니까. 제가 있지 않습니까.”
“응....그래. 너랑 있으면 아무것도 무섭지 아니하니 이상하구나.”
넋 놓고 중얼거린 그 말에 돌쇠는 입꼬리를 들어올려 반갑게 웃었다.
그 날.
그 날의 정사는 마치 초야 같았다. 몸을 한 두번 섞은 것이 아닌데도 그렇게 느껴졌다. 빗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어둠 속. 촛불을 불어 끄면 장대비가 마치 두꺼운 커텐처럼 두 사람을 가렸다. 아무도 없이 세상에 둘만 남겨진 것 같은 기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를 두렵게 하던 비였는데 차라리 더 요란하게 쏟아졌으면,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이루카는 천천히 이불 위로 밀어 눕혀졌다. 돌쇠는 그 어느때보다 조심스럽게 작은마님의 옷고름을 풀었다. 손끝부터 발 끝까지 드러난 피부에 빈틈없이 입맞춤을 떨어트렸다. 온 몸에 입술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작은마님은 부끄러움과 수줍음에 시달리며 사내의 몸을 처음 안 사람마냥 몸을 비틀었다.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은애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고, 뜨거운 정을 속삭여도 그것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온 마을을 숨죽이게 한 맹렬한 빗소리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네가 내 것이니.. 내가, 네 서방이지.”
제 귓가를 간지르는 습한 숨결과 서로의 체온만이 전부인 공간. 느리지만 힘있는 허릿짓에 사내의 어깨를 껴안는다. 이루카는 눈꼬리에 눈물을 뚝 떨구고는 허약한 목소리로 돌쇠를 불렀다.
“서방님...”
그 날.
무섭게도 비가 쏟아지던 그날. 어떤 사내가 하타케가의 사랑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내는 얼굴을 가린 것도 아니었고, 몰래 숨어든 것은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그저 비를 뚫고 저벅저벅 흙마당을 가로질러 사랑채의 장지문을 벌컥 열었다. 그는 열어 제친 문을 닫지도 않고 그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깜깜한 방 안으로 사내의 모습이 사라진다. 그 사내는 사랑채에 그리 오래 머무르지는 아니하였다. 머지않아 다시 쏟아지는 비 속으로 걸어나와 마당에 잠시 멈춰서서 쥐새끼조차 숨을 죽인 하타케가를 휘 들러보았다. 비에 젖은 사내의 얼굴은 편안했고 또 고요했다. 그는 끽끽 거리는 쇳소리를 닮은 그 섬뜩한 비가 무섭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쏟아지던 장대비는 사내의 발자국을 다 지우고 그제서야 만족한 듯 서서히 가늘어졌다.
그 날.
하타케가의 주인마님은 시신이 된 채 발견 되었다. 해가 뜨기 시작한 무렵, 비가 그친 후의 상쾌한 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진 것은 작은마님의 비명소리였다. 식솔들은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사랑채 앞에 몰려들었다. 활짝 열린 사랑채 안에서 그들이 본 것은 주저 앉아 떨고 있는 작은마님과 귀신이라도 본 마냥 눈을 부릅 뜬 시신 한 구였다. 늙은 원숭이마냥 쪼그라든 시신은 팔십 노인처럼 볼품이 없었고 이미 이곳저곳에서 스멀스멀 악취를 풍겨대고 있었다. 식솔들은 당황했지만 그래도 작은마님보다는 재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옥분이는 바닥을 짚고 있는 작은마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서방이 시신이 되었으니 당연하다. 재빨리 부축하려 하였지만 작은마님은 충격이 너무 컸는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굳어버린 듯 꼼짝 없이 시신을 바라보고 있던 마님이 그제서야 고개를 든다. 작은마님은 고장난 인형처럼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다 시선을 올려 돌쇠를 보았다. 돌쇠는 작은마님을 보고있지는 아니하였다. 살짝 턱을 치켜들고 빤히 시신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을 뿐. 다들 갑작스런 변고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데 돌쇠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을 하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다. 돌연 피가 얼어붙는다. 벌어져 있던 아랫입술이 떨리며 치아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를 내었다. 안그래도 핏기없이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기어이 파랗게 피어오른다.
“빨리 누가 작은마님 좀 방으로 모셔다 드려라!”
심상치 않은 모습에 옥분이가 다급히 말을 하면 돌쇠는 기다렸다는 듯 제가 모시겠다며 마님을 들쳐 안았다. 기력 없이 늘어진 몸은 힘 없이 딸려 올라갔다. 가벼운 몸이 아닌데도 그것을 견딜 수 있을만큼 팔힘은 억세고, 이루카는 되는대로 그 팔에 안겨 사랑채를 나왔다. 사랑채에서 멀어져 방에 가까워졌을 때 쯤 돌쇠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그 어조만큼은 왠지 기분이 좋은 것 같이 들렸다.
"이제는 사랑채에 아니가셔도 됩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루카는 그 말에 멍한 시선을 들어 돌쇠를 응시하였다. 회색 눈동자가 시신을 보고 있었을 때와는 달리 저를 향해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바로 몇시간 전까지 정을 나누고 있었던 사내의 얼굴이 시야를 메운다. 하타케가 작은마님은 돌쇠의 말 속에 감춰진 의미를, 그 날, 그 새벽 벌어졌던 무서운 일을 눈치 챘을까?
“응..”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날.
이루카는 떨리는 팔을 들어 돌쇠의 흰 목을 단단히 끌어 안았다.
•••
아들이 변고를 당했다는 말에 큰마님은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기어이 혼절을 하였다. 대가 끊기게 생겼으니 이제 조상 볼 면목이 없다. 반나절 후에 깨어나고서는 반 미친 사람이 되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기어이 치매가 왔는지 이튿날엔 바닥에 소변을 지리고 똥을 칠하였다. 서방은 돌연 이유도 없이 죽어버리고 성격밖에 안남았던 시어미마저 정신줄을 놓았다. 아이도 없이, 집에 남은 것이라곤 이제 열 여덟 밖에 안먹은 젊은 며느리 뿐. 사람들은 왠지 불안불안 하더라니 결국 일이 이리 되었다고 혀를 찼다. 장대비가 그리도 불길하게 쏟아지더니, 기어코 저승사자가 다녀간 것이 틀림 없다. 안그래도 썰렁했던 하타케가는 마치 죽음이라도 드리워진 것 마냥 어둡고 음침하였다. 그러나 나쁜 일 뒤에는 좋은 일 오는 것이 세상 이치라. 발인 날 선산에 주인마님을 묻고 집으로 돌아온 그 때였다.
“우욱...! 욱!”
돌연 작은마님이 헛구역질을 시작하였다. 작은마님은 조문을 하러 온 사람들을 위해 준비해 둔 음식 냄새를 참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혼자서 바쁘게 상을 치르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으니 배탈이 난 것은 아니다. 옥분이는 처음에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그 헛구역질 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아이를 다섯이나 놓아 본 몸이다. 구역질 소리만 들어도 그 것이 애가 선 소리인지 아닌지 아는 것이다.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힘들어하는 마님을 서둘러 방으로 옮겨 뉘이고 의원을 불렀다. 의원이 신중히 하타케가 작은 마님의 맥을 짚는다. 하타케가 가솔들은 장지문 너머에서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님, 회임 경하드립니다!”
의원의 말에 지친 얼굴로 팔목을 내밀고 있던 작은마님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수줍은 듯 고개를 돌렸다.
하타케가 작은마님이 회임을 하였다. 그 소식은 바람보다 빠르게 마을로 전해졌다. 씨가 귀한 하타케가에 이 이상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어딘가 항상 냉랭한 기운이 흐르던 이 집에 작은마님의 회임소식은 봄이나 다름이없었다. 착하고 고운 성심을 가진 작은마님 소식에 동네 사람들도 모두 제 일처럼 기뻐하였다. 큰마님은 정신을 놓았다가도 때때로 언제 그랬냐는 듯 정신을 차리곤 하였는데, 정신이 든 때를 보아 소식을 고하면 마른 나뭇껍질 같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삼신할미께 연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한스러운 삶을 산 여인이다. 하타케가에 시집와 애도 한번 못 배 보고 제 손으로 첩을 다섯이나 골랐다. 그놈의 씨가 대체 뭐라고 있는 구박 없는 구박 다 들어가며 살았는데, 또 그 핏줄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팔십 평생을 견디었다. 며느리가 애를 뱄으니 이제 도리를 다 하였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첩의 몸을 빌려 얻은 아들에 대한 정 보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시달렸던 큰마님은 벼르고 별렀던 사람처럼 삼일 뒤에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아직 주인마님의 49재도 먼 시점이다. 그래도 하타케가 가솔들은 기가 죽거나 하지는 아니하였다. 오래 모시던 웃전 두 분이 갑자기 죽어 놀라긴 하였지만은 작은마님과, 또 그 배 속에 어린 상전이 계시지 않은가.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다.
“죽기 전에 씨라도 남기고 가셨으니 다행이지.”
다들 그리 여겼으니 돌쇠는 적절한 때 참 잘 죽였다고 생각하였다.
•••
그 때로부터 열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이듬해 4월. 하타케가는 진통이 시작된 마님 때문에 오전부터 부산하였다. 이미 일주일 전부터 하타케가에 대기를 하고 있던 산파는 아랫것들에게 이것저것 해산 준비를 시켰다. 해산을 위해 꾸며둔 산실에서 끙끙거리는 신음소리가 높아질수록 식솔들의 표정도 긴장으로 굳어간다. 늦은 밤, 새벽이라 해도 좋을 시각.
“마님. 조금만 더 힘을 내시오. 조금만 더.”
산파는 오랜 진통에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을 듯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마님의 기운을 북돋우며 이마에 뜬 땀을 훔쳤다. 목에 명줄을 파르라니 세운 채 기절 하려는 것을 곁에 있던 옥분이가 볼을 때리며 말린다. 산실 밖에서는 가솔들이 모여 곧 죽을 듯 고통에 찬 신음소리에 얼굴을 백짓장같이 하고 있으니 물론 그 중의 으뜸은 돌쇠였다. 부지런히 왔다갔다하며 심부름을 하는 이들을 붙들고 마님 죽는 거 아니냐고 성화를 해대는데, 그 꼴이 너무 다급해보여 처음엔 곱게 곱게 대꾸해주던 청향이도 결국 냉큼 꺼지라 정강이를 걷어찼을 정도. 그 뒤로 두싯경이나 더 지났을까. 드디어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서서히 아이의 머리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산파와 옥분이는 긴장과 기쁨에 얼굴을 상기시켰다. 그런데 이윽고 들린 우렁찬 울음소리에 두 사람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으니 이 무슨 일인가. 기뻐 호들갑을 떨기는 커녕 아기를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하니 이상한 일이다. 면보에 싸인 작은 아기를 응시하면서 산파와 옥분이는 말 없이 숨을 집어 삼켰다. 등골에 찬 식은땀이 흐른다. 기력을 잃고 팔다리를 내던진 작은마님이 가쁜 숨을 할딱이며 바들거리는 손 끝을 뻗었다. 산파와 옥분이는 그제서야 정신이 든다.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일도 아닌 척 건강한 아기를 작은머님의 머리께에 뉘였다.
“마님, 보십시오. 건강한 도련님이십니다.”
땀과 눈물로 얼룩진 시선으로 꿈틀거리는 아기를 보는 눈빛이 애처롭고 사랑스럽다. 어딘지 차분하지 못한 태도로 그것을 보고 있던 옥분이는 산실의 문을 열고 밖에 도련님이 태어났음을 알렸다. 돌쇠가 저를 빤히 바라보며 마님은 건강한가를 묻는다. 섬뜩섬뜩 제 뒷골을 잡아당기는 소름을 느끼면서 옥분이는 차마 돌쇠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 날. 하타케가 대문에 빨간 고추가 달린 금줄이 걸렸다. 하타케가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도련님은 건강하게 몸을 잘 움직였고 팔 다리도 튼튼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사지 멀쩡한 도련님을 보고 때에 맞지도 않게 놀란 것이 어디 비단 옥분이와 산파 뿐이었겠나. 하타케가 사람들은 물론이고 동네 사람들까지도 도련님을 보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섬뜩함에 몸을 떨었다. 옥같이 흰 피부, 회색빛 눈동자에 깨끗한 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태어난 도련님. 그 도련님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는 어떤 사내를 떠올리게 하고, 그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일어나서는 안되는 무서운 일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스친다. 입에 대기조차 겁이 나는 일이 벌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
아니, 그럴리가 없다. 저 보다는 늘 아랫것들을 챙기던 착하고 상냥한 마님이다. 구박을 받아도 늘 시어미와 서방님을 모시면서 집안일도 살뜰히 보살피던 마님이 아닌가. 동네에서도 사정이 딱한자가 있다하면 사비라도 털어서 도움을 아끼지 아니하니 작은마님 은혜 한번 안입어본 자가 이 동네에 어디 있으랴. 작년 종자도 못건질 정도로 가뭄이 들었을 때 작은마님이 소작료와 지대를 받지 아니했던 일은 아마 백년은 더 회자될 것이다. 고운 마음만큼이나 아리땁게 자란 작은마님이 설마 천한 종놈과......설마. 거기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동네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하타케가는 어찌되느냔 말이다. 이것은 일일히 따져서 좋은 일이 아니다. 괜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나. 모르는 것이 약인 때도 있는 법 아닌가. 태어난 도련님은 분명 하타케가의 핏줄이 맞다.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 도련님은 하타케가의 유일한 주인마님이다.
도련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잔치상에서 넋을 빼고 있던 자들은 이렇게 애써 스스로를 속이며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그것으로 마을은 평화로웠고 하타케가는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으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 공공연한 죄는 또 그렇게 성립되었다. 하타케가의 대문을 지나던 한 노파만이 금줄을 보고서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혀를 찼다.
“기어이 이리새끼가 주인을 물었구나.”
•••
잘생긴 얼굴과 사내답게 훤칠한 하타케가의 도련님은, 확실히 범상치는 않은 인물이었다. 걸음마를 떼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어려운 글을 읽고 쓰니 천재도 그런 천재가 없는 것이다. 하타케가는 예로부터 정계에 높은 인물들을 많이 배출해 낸 가문이기는 하였지만 지금까지 이토록 뛰어난 도련님은 없었다. 고귀해 보이는 외모와 총명한 두뇌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큰 가문을 이끌어 갈 인물로 손색이 없었다. 열 둘에는 당당히 장원급제를 하고 금의환향을 하였다. 아직 혼기도 되지 않았는데 고관대작 가문에서 중매쟁이를 보내오기도 하였다.
하타케 카카시. 도련님의 이름은 하타케 카카시였다.
이 이름을 지은 것은 이제 안주인 노릇을 하게된 이루카였다. 옥분이는 왜 귀한 도련님 이름을 그리 천하게 지으시냐며 툴툴대었다. 도련님에게 어울리는 좀 더 멋진 이름이 많이 있지 않냐는 것이다. 그 투정에 마님은 빙긋 웃었다. 하타케가의 뒷마당에서는 여전히 장작패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마님이 답하였다.
“어찌 허수아비라는 이름을 천하다 하니. 허수아비가 없으면 그 넓은 논밭을 어찌 지키겠니.”
그 말에 옥분이는 그것도 맞는 말씀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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