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KAIRU ONLY 페러렐 90% 이상 분포 주의
※표시가 붙은 글은 폭력 및 성적 묘사를 포함합니다. 표시가 없어도 기본 어른테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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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카는 원래 부자를 경멸하는 편은 아니었다. 되려 돈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야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여유가 있는 사람이 돈을 많이 써야 경제라는 것도 잘 돌아가는 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본디 생산경제라는 것의 속성이 그렇다. 쏟아져 넘치는 물건들과 서비스를 소비해주는 사람이 적으면 사람들은 일할 기회를 잃을 것이고 경기는 곧 침체될 것이다. 시장에 돈이 부족해서 발생하는 고통의 대부분은 자본을 가지지 못한 서민들의 몫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세간에서는 명품을 소비하는 사람들을 나쁘게 보고 소박하게 사는 것을 미덕이라 칭하는 것 같지만 그건 틀렸다. 돈은 각자 분수에 맞게 쓰는 것이 미덕인 것이다.
따라서, 이루카는 그 하타케 카카시라는 남자가 어떤 비싼차를 타고 어떤 고급식당을 소유하고있던지간에 그것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생전 처음보는 부자의 씀씀이에 눈살이 찌푸려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순전히 자신의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복수라고 하기엔 너무 큰 금액을 보면서 처음에 느꼈던 황당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묘한 분노로 변하였다. 이루카는 인출한 삼십만엔을 보면서 생각했다. 적어도, 남자는 이번 건에 한해서는 돈 쓸 곳을 잘못 골랐다. 남자에게는 이만엔이건 삼십만엔이건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고용주를 한방 먹이고 도망친 발칙한 남학생인데도, 그렇게 그 꼴이 불쌍하게 보였던 것일까. 이루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남자에게 굽실거렸던 사람들 중에는 어쩌면 그가 선심쓰듯 내놓은 삼십만엔을 기뻐하며 받는 사람도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루카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이 일한만큼만 벌어서 번 만큼만 쓰고, 그렇게 나름대로의 생활을 설계해 나가는 것. 그것이 이루카의 생활이었다. 고등학생때까지는 학생신분이라 좀 어려웠지만 스무살이 되고나서는 이런 생활도 꽤 수월해졌다. 수업 들으랴 아르바이트하랴 뼈가 부러지는 생활을 해야했으나 그만큼 제대로 제 몫을 해나가고 있다는 자부심은 있었다.
그 남자는 자신이 이 삼십만엔을 받고 감사해 할거라 생각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돈 많은 사람이 대접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모욕할 권리까지 있지는 않을터였다. 이루카는 삼십만엔을 흰 봉투에 넣어 잘 쓰지 않는 서랍장 깊숙히에 박아 넣었다. 사실, 당장이라도 그 가벼운 남자를 찾아가서 그 잘난 면상에 이 돈을 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루카는 그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날 저녁 방구석에 깔린 일인용 매트리스 위에서 이루카는 습관처럼 노트에 숫자를 끄적거렸다. 이제는 자릿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운 수의 단위를 이루카는 꽤 능숙하게 다루는 편이었지만 이 날은 왜 인지 손이 나아가지 않았다. 자꾸만 그 남자와 그가 주었던 삼십만엔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그 남자와의 일은 잊어버리자고 다짐해도 가슴에 한번 맺혀버린 응어리는 쉽사리 사라져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이루카는 이내 노트를 덮고 베개에 얼굴을 파뭍었다. 쉽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이루카가 그 남자에 대한 분노를 내내 마음에 안고 있을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 어느새 그 남자의 일은 머릿속에서 깜박 잊혀졌다. 일시적인 사건에 감정을 소비할 수 있을만큼, 이루카의 매일매일은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다.
쏟아지는 과제를 처리하고 얼마 남지 않은 시험 대비를 하고, 그런데도 아르바이트는 그만 둘 수 없었다. 급감한 수면시간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이 용할 정도였다. 이제는 슬슬 학기말이었다. 다음 학기 등록금을 생각했을 때, 이루카는 문득 서랍장 속에 들어있는 삼십만엔을 떠올렸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방학 동안에 아르바이트를 늘리면 학비는 어떻게든 된다. 누가 칭찬해주지도 않는 고집이래도, 비굴하게 되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그렇게 그 날로부터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고 세 주가 지났다. 그렇게 이루카의 머릿속에서는 그 은발 미남의 일이나 돈의 일은 까맣게 지워져 버렸다. 강렬한 인상의 사람이었고,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한 황당한 경험이었음에는 분명했지만 학교와 좁은 집을 오가는 이루카의 생활에는 그 갑부를 떠올릴만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루카가 하타케 카카시를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 조금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루카가 조금 숨을 돌릴 여유가 생긴것은 여름 방학에 돌입한 무렵이었다. 물론 바지런한 이루카는 이미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방학 직전 시험기간에만 이미 세군데나 면접을 봤다. 지금도 이루카는 한 펍에서 면접을 본 참이었다. 영업시간 전에 봤으면 좋겠다고 해서 오전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일요일에 답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서 집에 오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감자와 돼지고기를 조금 샀다. 카레를 할 생각이었다. 적은 재료로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카레는 생활비를 아끼는데는 적격이었다.
집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이루카는 허름한 동네에서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자동차를 한대 발견했다. 마이바흐 62 재플린이었다. 그 번쩍번쩍 휘양찬란한 자태가 냄새나는 원룸촌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는 모습은 뭐랄까, 감상을 말할 수 없을 만큼 기이하고 이상했다. 이루카는 문득 한달 전쯤에 보았던 람보르니기를 떠올렸다.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에 소름이 돋았다. 왜 저런 차가 자신의 원룸 아파트 앞에 주차 되어 있는 것일까.
이루카는 희미하게 떠오르는 불쾌한 기억에 불안해 하면서도 천천히 자신의 원룸 아파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나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는지.
"안녕."
은발의 그 남자, 하타케 카카시가 이루카의 원룸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남자를 본 순간, 이루카는 눈 뜨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 여기에 있을리 없는 사람의 모습에 벙 쪄서 바보처럼 대답도 못했다. 이루카는 마치 어제 만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에게 화를 내야 할지, 따져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할지 알지 못하고 그저 망연히 정면을 응시했다. 남자는 처음 봤을때와는 조금 다른 캐주얼한 정장차림에, 풍성한 은발을 뒤로 자연스럽게 넘기고 있었다. 조금 우습지만, 빛이 나는 남자는 싸구려 원룸촌에서도 빛이 나는 거라고, 때에 맞지 않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빽빽하게 밀집되어 회색빛이 강한 동네를 배경으로 남자는 혼자서만 다른 사람이었다. 처음 이 남자를 만났던 날 자신 역시 이렇게 이질적이었을테다.
말없이 서서 경계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루카의 시선에 남자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원래는 좀 더 빨리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출장이 잡혀서 말야."
물론 이루카가 궁금했던 것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저희 집 어떻게 아셨어요?"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날, 이루카는 남자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었다. 본명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하물며 집주소를 알렸을 리 없었다. 남자는 의외로 순순히 답해주었다.
"사실은 저번에 보건증 몰래 봤어. 밥 먹을 때 너 잠깐 화장실 간다고 나갔었잖아. 안되는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대로 헤어지면 다시 못볼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이루카는 팔짝 뛰었다.
"제 가방 뒤졌어요?"
"어쩔 수 없었어. 아무것도 안가르쳐 주니까."
이루카는 물고기처럼 입을 빠끔빠끔 했지만 차마 말은 자아지지 않았다. 애초에 남의 가방을 몰래 훔쳐 보는 것이 어쩔 수 없다는 말로 포장할 수 있는 행위인가? 범죄 아니야? 그래도 남자의 태도가 너무 뻔뻔스러웠기 때문에 이루카는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너무 놀라서 그런건지 분노 때문인지 펄떡펄떡 거리는 심장을 가라 앉히고 이루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신고할거예요.”
“좀 봐줘. 어쩔 수 없었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다는게 말이 되냐고. 이루카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생글생글 웃고 있는 이 남자는 이루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행동하는 것일까? 설마 벌써 한달이나 지난 그때 일을 따지러 온것인가 싶었다. 설령 제 행동에 화가 났다고는 해도 찾아오기까지 하다니 정말 정신이 나간 사람이다.
“혹시 그 때 제가 애인대행이라는 거 밝히고 가버려서 오신거예요? 그건 죄송했습니다. 그런데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실 일은 아니잖아요.”
“뭐.....그건 나름대로 황당했지만.”
“속이기 싫었어요.”
“알아. 그 일은 이제 됐어.”
“......”
"그 날 집에는 잘 들어갔어? 사실은 집까지 바래다주고 싶었는데. 너 가버리고 나서 억지로라도 잡을 걸 후회했어."
아무래도 남자는, 복수니 뭐니 하는 일로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닌 것 같았다. 이루카는 시선을 내리고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가 자신을 찾아올 이유같은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신건데요?”
“.....”
남자는 이루카의 말에 답하는 대신 마트 로고가 인쇄된 반투명 비닐봉지를 보고서는 되물었다.
"쇼핑하고 오는거야?"
이루카는 황급히 비닐 봉투를 뒤로 감췄다. 망연했던 사고가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슬슬 제 꼬락서니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나마 면접을 보기 위해서 깔끔한 옷을 꺼내 입었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간소한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을 하고 있는 것은 둘째치고 이 남자에게 생활 냄새 나는 비닐 봉지를 보여주는 것은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아직 점심 안 먹었으면...."
그때였다. 남자의 존재와 함께 그간 잊고 있었던 돈봉투가 떠오른 것은.
"잠시만요!"
이루카는 남자의 말도 댕강 잘라버리고 집으로 뛰쳐 들어왔다. 비닐봉투는 일단 개수대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서랍을 뒤집었다. 이젠 어디에다 뒀었는지 기억도 애매해서 서랍을 몽땅 열어서는 속을 한바탕 다 헤집어야 했다. 봉투는 잘 쓰지 않는 서랍 깊숙한 곳에 있었다. 두툼한 봉투를 열어보면 한달 전에 이루카가 인출해 두었던 삼십만엔이 일엔 하나 부족함 없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루카는 그 돈봉투를 들고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지저분한 집안이 보이지 않도록 현관을 꽉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것을 일언반구도 없이 들이밀면 남자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거 뭐야?"
"돈이요."
"돈?"
영문을 모르겠다는 남자의 태도에 잊었던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 잘난 면상에 이걸 확 던져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떠올랐다. 이루카는 꾹 참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말해보려 했지만 말투에서 뾰족한 가시까지 제거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저 일도 제대로 못했고 돈 받을 생각도 없었어요. 돈 액수도 잘못 입금하신 것 같고요. 설마 진짜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돌려드릴 수 있게 되서 다행이네요. 받으세요."
남자는 미간을 좁히고 잠시간 말이 없었다. 선뜻 봉투를 받지 않는 남자에게 초조함을 느낀 이루카가 재촉했다.
"팔 떨어져요. 빨리 받으세요."
그러면 남자는 작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거 잘못 준 거 아닌데. 별 거 아니니까 그냥 받아."
하지만 남자의 대답은 본격적으로 이루카의 분노를 부채질 하는 것이었다. 별 거 아니라니? 삼십만엔이 별거 아니야? 이루카는 그렇게 쏘아붙이려다가 관뒀다. 삼십만엔은 이루카에게는 학비를 해결하고 생활을 조금 더 윤택하게 해줄 수 있는 큰 돈이었지만 남자에게는 다른 것이 분명했다.
이루카는 이층 제 현관 복도에서 내려다 보이는 골목에 세워진 마이바흐를 다시한번 보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갑부 앞에서 쓸데 없는 자존심을 세우고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쓸데 없는 동정심은 사양이었다. 일하지 않고 받은 돈을 감사히 받을 수 있을만큼 비굴하지도 않았다.
"제가 왜요? 왜 댁한테 그냥 돈을 받아요? 제가 거지예요?"
"왜 그렇게 받이들여?”
“저 그 날 한 것도 없는데요? 저 같은 애 보니까 혹시 동정심같은 거 들어요?”
“그냥 내가 너무 고마워서 넣은 것 뿐이야! 나 때문에 시간 쓴 건 사실이잖아?”
남자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 말이 곧이 들리지 않은 이루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물론 이런 태도를 자격지심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100엔 동전 하나를 앞에 두고도 주고 받음이 확실한 세계를(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겪으며 살았던 이루카로서는 이 낯선 남자의 호의가 단순한 호의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일한만큼 받고 당한만큼 돌려준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삶의 원리이자 삶의 신조였다.
"어쨌든 싫어요. 그런 돈은 못받아요. 호의라고는 하셔도 솔직히 전 엄청 짜증나고 화나요.”
그래도 남자가 돈을 받으려 하지 않자 이루카는 남자의 손을 잡아 직접 봉투를 쥐어 주었다. 그제서야 남자는 얼떨떨하게 봉투를 받아들고서 난감하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그걸 본 이루카는 속이 다 시원했다. 이렇게 개운한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원래 그렇게 꼬였어?"
남자가 물었다. 이루카는 남자가 그렇게 받아들여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 원래 이래요."
"저기..."
"그럼 안녕히 가세요."
이루카는 의기양양하게 뒤돌아섰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뒤에서 뻗어나온 손이 이루카의 어깨를 잡고 그것을 제지했다.
"왜요?"
"그냥 들어갈거야? 얌전하게 생겼으면서 왜 이렇게 새침해? 나 왜 왔는지 안물어 봐?"
남자는 작게 혀를 차고 말했다. 냉정하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이 남자가 초조해 하는 모습은 좀 웃겨 보였다. 이루카는 아까 남자가 밥 어쩌구 했던 말을 떠올리고 답했다.
"밥 먹자고 온 거 아녜요?"
"맞아."
"싫어요."
"왜?"
"제가 왜 그쪽이랑 밥을 먹어요? 남의 가방 뒤져서 집까지 찾아오고 그렇게 할 일이 없어요? 스토커로 신고하기 전에 가세요."
이루카는 신경질적으로 제 어깨를 잡은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남자의 손은 쉽게 뿌리쳐지지 않았다. 심지어 아프기까지 했다.
(뭐지 이 데자뷰...)
이루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남자의 잘생긴 얼굴은 반발자국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자칫 숨이 느껴질 수도 있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이루카는 저도 모르게 몸을 바싹 움츠렸다. 그걸 본 남자는 이내 손을 떼어주었지만 어쩐일인지 이루카는 움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강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박력이 있는 남자였다. 시원하고 산뜻한 향수냄새를 맡고서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땐 일이니까 참았지만..... 이루카가 속으로 신음하는 사이 남자가 재촉하듯 이루카를 다그쳤다.
"그럼 왜 내가 네 가방까지 뒤져가면서 주소 캐내고 싶어했는지는 안 궁금해?"
그렇게 물어 봤자......
이루카는 난감했다. 적어도 이루카가 생각하기에 이 남자가 굳이 자신을 찾아올 이유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제 가방을 뒤져봤자 알 수 있는 것은 정말 기껏해야 이름이나 주소 정도가 다였을 것이다. 그냥 돈 많은 남자가 여유를 주체하지 못해서, 라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만 떠올랐다. 억지추론이었지만, 이게 아니라면 왜 이런 사람이 자신의 집까지 찾아와서 밥을 먹자고 한단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 매달리는 듯한 제스춰까지 취하면서. 이루카는 솔직히 답했다.
"어차피 변변찮은 이유 때문이겠죠...."
이 대답은 바라던 말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그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저기, 뭔가 내가 마음에 안드는 건 알겠는데....확실히 좀 이상한 꼴을 보여주긴 했지만."
"....."
돌연 남자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이루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루카의 눈에 남자는 조금 쑥쓰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어린 표정을 짓는 남자의 모습은 내심 놀라웠다. 남자는 작은 한숨을 두어번 내쉬고 불편한 듯 시선을 돌렸다. 흰 귓볼이 붉으스레해진 것이 인상적이었다. 남자는 망설이면서도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귀엽다고 생각했어."
"네??"
솔직히 말해서 청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이루카가 채 다 놀라기도 전에 남자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선명한 모양으로 이루카를 붙들었다.
"귀여웠다고. 너는 내가 시시한 놀이하면서 돈지랄한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마음에도 없는 애 데리고 시간써가면서 밥 먹자고 할 정도로 미친놈 아니야. 그것도 약속까지 미뤄가면서. 진짜 내가 할일 없는 놈이라서 그런 것 같아? 굳이 처음 보는 사람 집 앞까지 찾아와서 이래?"
필사적으로 호소해오는 남자의 이야기는 쉽사리 이해될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이루카는 본격적으로 빨개진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문득 설마,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분명 이루카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하나의 가설이었다. 모든 조건을 다 배제하고 남자의 발언만 종합해 본다면, 남자는 (믿기지는 않지만) 자신을 귀엽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밥을 먹고 싶어했던 것 같았다. 이루카는 고개를 갸웃 하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설마 이거 고백인 걸까.’
이루카는 지금까지 좋아했던 사람 하나 없었고 연애는 꿈도 꾸지 않고 살아왔었다. 언젠가 자신도 연애를 하겠지 막연하게 생각은 했지만, 적어도 그 대상이 람보르기니와 마이바흐를 끌고 다니는 갑부에, 모델같은 기럭지와 몸매와 얼굴을 가진 남자에, 연상은 아니었다. 애인대행같은 웃기지도 않은 알바를 하다가 만난 사람이랑 눈맞게 될 확률은 또 얼마나 되는 걸까. 솔직히, 자신이 생각한 것이 자기과잉이 아니라고 확신할 근거도 없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 이루카는 말했다
"....저기요. 혹시해서 물어보는건데."
"어."
"진짜 혹시나 인데요."
"......."
"저 좋아해서 여기 오신거예요?"
눈을 깜박이면서 무슨 백치마냥 순진무구하게 묻는 이루카를 앞에 두고 남자는 손발 다 들었다는 듯 제 은발을 벅벅 쓸어 넘겼다. 거의 쥐어 뜯는 수준이었다. 빤히 남자를 바라보는 이루카의 시선에 그는 이내 깊은 숨을 내뱉고서 말했다.
".....그걸 이제서야 알겠어? 나 지금 수작 부리는거야. 너랑 연애 좀 해보려고."
머리가 다 어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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