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KAIRU ONLY 페러렐 90% 이상 분포 주의
※표시가 붙은 글은 폭력 및 성적 묘사를 포함합니다. 표시가 없어도 기본 어른테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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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되서 어두컴컴한데로 끌려가는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도착한 곳은 빛이 잘 들어오는 고급 일식집이었다.

이루카는 전통 일식 정원이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는 VIP룸에 앉아서 눈 앞에 펼쳐지는 요리의 향연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처음 본 오키나와산 털게 요리와 자연산 전복찜이 넓은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셋팅되어 가는 모습은 흡사 예술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셋팅이 끝나면 장지문이 열리고 정좌를 한 요리사 복장의 남자가 나타났다. 말 그대로 전문가의 느낌이 드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이루카는 요리사의 세계는 잘 몰랐지만 틀림없이 메인 주방장쯤은 되는 사람같았다. 남자는 그대로 허리를 숙여 카카시와 이루카를 향해 절을 했다. 이때 이루카의 안면 근육이 사정없이 진동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룸 안으로 들어온 요리사는 다시 한번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는 테이블 근처에 앉아 대게와 전복찜을 먹기 좋게 손질하기 시작했다. 요리사가 개인 접시에 올려준 요리는 직접 껍질을 바를 필요도 없었다. 카카시는 젓가락을 들어 요리를 먹고는 옆머리 희끗한 요리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대접에 익숙한 남자라는 것은 이미 첫날에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설마 이런 장면을 또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차피 지불도 끝났고 남으면 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아깝다 생각하고 먹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요리를 보고 있다가 카카시가 그렇게 말하고서야 이루카는 젓가락을 들었다. 육즙이 살아있는 탱글탱글한 털게의 다릿살을 한점 들어 입에 집어 넣었다. 솔직히 맛은 알기 어려웠다. 남자는 집 앞에서의 소동이 거짓말이었던 것 처럼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정말로 진심이었던 걸까. 연애하자는 말...)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생각해보았지만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 봐도 하타케 카카시라는 남자는 정말 잘생긴 사람이긴 했다. 풍부한 은발머리카락, 남자답지만 조각처럼 섬세한 턱선, 높고 반듯한 콧날, 형태 좋은 입술, 날선 눈매, 그 눈매 위를 깊고 오래된 상처 하나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일견 공포감을 조성할 법한 상처였는데 신기하게도 그것이 남자의 눈 위에 있으면 얼굴의 미관을 해치기 보다는 정함을 더했다. 수트 조끼로 인해 강조된 어깨에 시선이 닿자 끌어 안겼을 때 느껴졌던 탄탄한 근육의 감촉도 떠올랐다. 이루카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고 다시 제 앞접시에 젓가락을 세웠다.

이 남자가 얼마나 돈이 많은가는 제 알 바 없었지만 어쨌든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이목을 끌만한 사람인 건 분명했다. 하느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걸 다 주지는 않는다더니 그것도 다 거짓말이다.

화려한 식사는 아름답고 맛있어 보였지만 단지 피상적으로 느껴졌을 뿐 식욕은 돌지 않았다. 원래는 느긋하게 집에서 일요일을 즐길 작정이었다. 갑자기 난입해 들어와서 납치하듯이 자신을 끌고 나온 이 남자만 아니었으면. 문득 이루카는 자신이 하타케 카카시라는 남자에 대해서 아직 아무런 정보도 모른다는 것을 떠올렸다. 저 남자는 무슨 대단한 일을 하기에 보험번호 하나로 별별 제 신상정보를 꿰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순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상처는 어떻게 생긴거예요?”

이루카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남자는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뭐야, 드디어 나한테 좀 관심이 생겼어?”
“착각하지 마세요. 진짜 조폭 같아서 물어보는 거예요.”
“그런거라면 유감이네.”

그냥 보기에도 꽤 사연 있어 보이는 상처였다. 그러나 본인은 그다지 크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유리잔의 물을 한모금 들이키고는 순순히 답해 주었다.

“어렸을 때 납치 당했었어. 열두살인가 그쯤이었는데 엄청나게 큰 컨테이너에 같혀서. 이제 기억도 잘 안나지만 아마 선적장 컨테이너였을 거야. 바다 냄새가 났거든. 그때 죽어서 수장됐어도 뼛조각 하나 못찾았을 걸. 수십명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도망치려고 하다가 칼로.”

엄지손가락을 세워 상처 위를 긋는 제스춰가 장난스러웠다. 물론 말한 내용은 전혀 장난스럽지 않았지만 본인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이루카도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무슨 드라마 같네요.”
“진짠데.”
“거짓말이라고는 안했어요. 왜 드라마 같은데서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 이야기. 소설이나.”

이루카는 젓가락 끝으로 요리를 쿡쿡 찌르면서 말했다. 이루카의 몫으로 준비된 요리는 아직 반 이상 남아있었다. 이루카는 몇번인가 더 앞접시를 휘젓고는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솔직히 소화시킬 자신이 없었다. 이번엔 카카시가 물었다.

“그래서, 너는?”
“뭐가요?”
“너도 콧등에 상처 있잖아.”
“......이미 알고 계신 거 아녜요?”
“아쉽지만 보고서에 그런 내용까지는 없더라고.”

보고서라니. 이루카는 다시한번 기가 막혔다. 하타케 카카시는 누군가에게 자신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시켰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곳에서 제 뒤를 캐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불쾌한 것 이상으로 소름이 돋았다. 그것을 애써 속이고 일부러 혀를 차보였다.

“보고하신 분이 별로 능력이 없으셨나봐요?”
“그러게.”
"그 저에 대한 보고서라는 거, 에이포용지 반장쯤은 되요? 저기요. 저랑 연애하고 싶다는 말 진짜예요?"
"어."
"혹시 너무 돈이 많으면 뭐 머리가 약간 이상해진다거나 그런거 있어요?"

이루카는 관자놀이 근처에 손끝을 빙빙 돌리면서 말했다.

"바람둥이 한량으로 보더니 이젠 정신병자 취급이야?"

(바람둥이는 맞으면서.)

이루카는 이 말은 굳이 하지 않았지만 썩은 표정을 지은 것만으로도 카카시에게는 충분히 전달 되었다.

"어쨌든 나 정신 멀쩡해. 걱정마."
"걱정 같은 거 안해요. 아무리봐도 미친사람 같아서 그렇죠."
"처음 봤을 때부터 귀여웠다고 했잖아."
"그 말 좀 그만 하세요. 어떻게 이런 평범한 남자애를 보고 귀엽다는 소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요? 이런 비싼데서 밥먹이고. 토토한테 주는 먹이치곤 과한 거 아녜요? 돈 투자하실데가 그렇게 없어요?"
"무슨 소리야? 나는 지금 충분히 의미있는 곳에 투자중이고, 내 취향에는 터치하지 말아줬으면 해. 그래서 그 상처는 왜 생겼는데?”

정말로 궁금하긴 한지 카카시는 한쪽 팔을 테이블에 기대고 앞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루카가 보기에도 제 눈 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에게 묘한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지금 이렇게 나란히 마주 앉아 대화를 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토토라는 토끼새끼랑 닮아서 귀여워 보였다라는 그 막돼먹은 언사는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짜증이 나긴했다.

“이제 겨우 두번째 만난 사람한테 이야기 하긴 싫어요.”
“냉정하네.”
“.....”

매력적인 사람임에는 틀림 없었다. 눈이 마주치면 무심코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자신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거였다. 잘생긴 외모, 어른스럽고 여유로운 말투, 제스춰, 그 모든 것들이 그랬다. 확실히 좀 제멋대로이고 의외성이 있는 사람이기는 해도 그것을 단점이라고 지적하기에는 약해 보였다.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이 하면 큰 단점으로 보일만한 것들도 그가 하면 단점으로도 안보일만큼 잘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냥 너랑 얘기 한번 하고 밥 한번 먹자고 한달이나 기다렸어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을 때는 분위기에 휩쓸려서 정말 진심인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물론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애초에 이루카는 그가 자신에게 느꼈다는 연애감정이 진심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카카시의 약혼녀라는 사람이 화를 내면서 했던 말은 이제는 거의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한가지는 확실했다. 때마다 상대를 갈아치우면서 진심으로 연애한 적이 없는 남자가 이번에는 뜬금없이 자신에게 시선을 붙였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이었다. 다르다는 점에 호기심을 느꼈다면 남자는 확실히 탁월한 선택을 했다. 이 그럴싸한 남자는 자신같은 보통 사람과는 연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았을 터였다. 지금도 그렇다. 만약 이루카가 혼자 이 가게에 왔다면 아마 입구에서 드레스코드부터 지적당했을 것이다. 스스로를 자학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서로의 삶의 바운더리를 수식화 한다면 분명 이럴 것이다.

A∩B=ø

물론 n(A∩B)=1이라고 쓸 수도 있겠지만 아무 내용도 없는 1로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이야? 어쨌든 이루카는 타인이 보여주는 작은 호의에 일희일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억지에 끌려서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지 자신이 지금 이 잘난 남자의 시시껄렁한 연애 놀이에 휘둘리고 있는거라 생각하면 위까지 아파왔다.

이루카는 입술을 앙다물고, 재미있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자신과는 달리 하타케 카카시는 정말로 이렇게 같이 밥을 먹고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즐거운 것 같았다.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혼자 열내는 것도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루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동차 사고를 당했어요. 일곱살 때였는데 바닷가로 여행중이었어요. 엄마가 바닷가에서 아침해 보는 걸 좋아했거든요. 전 잘 기억도 안나고 들어서 아는 거지만.”

거기까지 말했을 때 남자는 돌연 젓가락을 내려 놓고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왜 그러세요?”
“대충 알겠으니까 더 말 안해도 돼.”

목소리에 난처함이 뚝뚝 묻어 있었기 때문에 이루카는 피식 웃었다.

“옛날 이야기니까 상관 없어요. 어차피 아시는 이야기잖아요. 보고서인지 뭔지.”
“.....”
“어쨌든 눈떠보니까 피 밖에 안보였어요. 상처는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어디 파편에라도 긁혔겠죠.”

사고에 대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사진이 없었더라면 아마 부모님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드문드문이지만 기억나는 장면은 있었다. 운전석에 아버지가 있고 조수석에 어머니가 있었다. 자신은 무슨 동요라도 부르고 있었던게 아닐까.

귀가 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큰 소리가 난 후에, 이루카는 전복된 자동차 밖에서 눈을 떴다. 자동차 밑에서는 믿지기 않을 만큼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계에라도 눌린 것처럼 박살난 자동차 창문으로 나와 있었던 팔이 아빠의 것이었는지 엄마의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어둠이 가라앉은 새벽녁 국도에서 살아 있었던 사람은 이루카 뿐이었다.

오직 피만 낭자했던 기억속의 장면을 떠올리고 이루카는 문득 헛구역질을 할뻔했다. 남자가 앞에 있었던 물잔을 내밀었다.

“얼굴 창백해.”
“별거 아녜요. 제가 먼저 얘기 한거고.”
“......밥 다 먹었으면 나가자. 데려다 줄게.”

오전까지만해도 좋았던 컨디션이 지금은 최악이었다. 돌아가는 자동차 안에서 이루카는 말 없이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운전석에 있던 남자는 이따금 시선을 돌려 이루카를 바라 보았지만 그 역시 딱히 말을 걸지는 않았다.

집 앞에 도착하면 어느새 동네에는 주황색 어스름이 지고 있었다. 먼저 차에서 내린 남자가 직접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왠지 낯간지러운 매너에 이루카는 애써 시선을 돌리고 재빨리 몸을 빼냈다. 약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그래도 어찌됐든 인사는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이루카는 잠시 뜸을 들였다. 남자도 한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이루카를 보고 있었다. 이루카는 의미 없이 바닥에 발 끝을 툭툭 차면서 말했다.

"오늘 좋은 밥 먹여주신 거 감사해요. 믿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좋다고 말씀해주신 것도 저로서는 신기한 경험이었고요."

애써 그렇게 예의를 말하는 이루카에게 남자가 되물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
“......”

거짓말로도 그렇다고는 대답할 수 없었다.

“오늘 내가 꽤 무리해서 끌고 나온 거 알아. 네가 날 미덥지 못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알고. 뭐 그것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로 내가 마음에 안드는 것도 알 것 같아.”
“...잘 알고 계시네요.”
“이래뵈도 나 꽤 똑똑해.”
“이상한데서 어필하지 마세요.”
“어쨌든.”

남자는 뒷머리를 휘휘 저어 넘겼다. 어릴적부터의 습관인지 그 행동에는 묘하게 어린 구석이 있었다. 어색한 곳에서 끊긴 대화 때문에 어쩐지 가라앉은 분위기가 불편했다. 그는 약간의 뜸을 더 들이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여기서 끝낼 생각 같은 건 없어. 연애하자고 했던 거, 네가 장난이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애초에 나도 네가 바로 마음을 열어줄거라고는 생각 안했어. 오늘 여기 온 건 그냥...”

그때 돌연 남자의 양 손이 뻗어나와 이루카의 볼을 꼬집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루카는 당황해서 양 팔을 버둥거렸다.

“으어...! 머, 머예어...!! 나여!!”
(으엇!! 뭐, 뭐예요!! 놔요!!)
“으하하핫!”

이루카의 얼굴은 억지로 만들어진 미소로 어색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정작 이루카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그런 이루카의 얼굴이 재미있는지 크게 웃었다. 날선 인상 때문에 왠지 차갑게 웃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루카가 남자를 노려보면 석양을 등지고 서 있는 은발 머리카락이 주황색에 젖어 묘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이루카의 볼을 놔주지 않은채로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아까전에 나 투자중이라고 했잖아. 사실은 장기투자를 생각했는데 그래도 중간중간에 본전 회수는 해야 투자도 오래 할 수 있겠다 싶어.”
“나여!!”
(놔요!!)
“너 오늘 한번도 안 웃은 거 알아? 처음 만났을때는 억지로라도 웃더니 오늘은 옛날 이야기 좀 했다고 울 것 같은 얼굴이나 하고. 자, 웃어봐 웃어봐.”
“아하혀!”
(아파요!)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볼살을 위로 끌어올리는 억센 손 덕분에 이루카는 기겁을 했다. 솔직히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이루카는 이 남자한테 한번 잡히면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두번의 만남 속에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더 이상 뜻대로 하게 놔둘까보냐. 오기가 생겨서 허공에 떠 있던 제 손에 힘을 넣어 자신에게로 뻗어있는 팔뚝을 잡아 밀어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 수록 제 볼만 더 아플 뿐이었다. 올려다본 남자는 이루카가 아무리 불만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들 그것이 마냥 재미있는 것 같았다.

“봐봐 웃으니까 이쁘잖아.”
“떠허뎌!! 나!!”
(떨어져!! 놔!!)

잠시간 두 사람은 잡고 잡아 떼는 모션을 취하면서 실랑이를 벌였다. 이루카의 마음속에 남자에게 느꼈던 억울함이 그 양을 차곡차곡 늘려가고 있었음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웃어보라니. 이루카는 자신이 울것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남자는 웃으라고 했지만 사실은 진짜 울고 싶을 정도로 심장이 빠듯하게 조여왔다.

힘이 빠진 이루카가 서서히 반항을 멈추자 그에 비례하듯 남자의 악력도 약해졌다. 아직 이루카의 볼을 잡고 있는 것은 여전했으나 아픈 정도는 아니었다. 떼어버리려면 떼어버릴 수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이루카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남자가 장난스런 눈빛을 지우고 울상인 이루카의 눈을 빤히 들여다봐왔기 때문이었다.

“......자, 그러면 이제 본전을 찾았으니 수익도 좀 내볼까.”

이루카가 남자의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이었다.

“!!”

얼굴이 가깝다고 생각했을 때, 외곡된 이루카의 입술에 뭔가 부드러운 것이 붙었다 떨어졌다. 이루카는 눈을 크게 뜨고 멀어져가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방금 전 보였던 진지한 태도는 또 어디론가 던져버렸는지 장난을 성공시킨 것 같은 개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뭐 한거야 이 사람은? 그렇게 사고할 여유도 없이 이루카의 얼굴은 이미 석양빛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르륵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때 이루카가 남자의 명치를 사정없이 가격한 것은 생각하고 한 짓이라기 보다는 거의 반사적인 것이었다.

“큭!!”

남자는 기습당한 명치를 끌어안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루카는 허리를 숙인 남자의 은색 정수리를 뒤로하고 그대로 집을 향해 달렸다. 가파른 원룸 맨션 계단을 뛰어올라가 이층에 있는 집 문고리를 당겼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연 현관문은 이루카가 열쇠를 집어 넣지 않아도 힘 없이 입을 벌렸다. 납치되듯 끌려나갔으니 문단속이라고 제대로 했을리 없었다.

뭐야? 저 인간 지금 뭐한거야?

뽀뽀를 당한거라고 이해하자마자 당황과 분노가 이루카를 휩쓸었다. 얼굴이 불에라도 덴 것처럼 화끈거리는 것은 필시 꼬집혔기 때문이다. 이루카는 집으로 들어서려다가 문고리를 잡은 채로 휙 뒤돌아섰다. 아직 원룸촌 샛길에 서 있는 남자는 맞은 명치를 움켜 쥔 채로 이루카의 집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에 애인대행을 불러 게이행세를 시도한다거나, 사람 뒷조사를 한다거나, 무턱대고 찾아와서 납치도 서슴지 않는다거나, 자신 같은 평범한 남자애에게 연애하자는 둥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남자라는 건 알았지만.

“변태!! 다시는 오지마!!”

이루카는 남자를 향해 있는 힘껏 고함을 치고는 쾅하고 현관문을 닫았다. 불도 켜지 않고 없는 척 현관 앞에 주저 앉아 있으면 밖에서 또 오겠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옛날 일을 기억해내고 거북했던 기분은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진 채였지만 제 빨간 얼굴을 가라앉히기 바쁜 이루카는 거기까지 깨닫진 못했다.

그날 저녁 이루카는 예정대로 카레를 하면서 벼락마냥 자신을 찾아온 남자를 생각했다. 장난스럽게 웃던 그 얼굴을 떠올리면 속이 울렁거렸다. 솔직히 한달 전이나 오늘이나 이루카는 자신이 남자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어부치는 것은 너 같은 건 반드시 넘어오게 되어있다는 자신감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 이루카의 머릿속에서 남자의 신용도는 마이너스로 처박혀 있었다. 누가 당신 마음대로 하게 한대? 어쨌든 이리저리 끌려다닌데다가 뽀뽀까지 당한 시점에서는 이것도 설득력 없는 이야기였지만 이루카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웃으니까 이쁘잖아.'

이루카는 무심코 그 말을 떠올리고는 국자를 움켜쥐었다.

(한 대 더 때릴 걸....)

그러니까, 지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그 남자의 말 때문이 아니라 카레의 김 때문인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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